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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엔 시신, 새벽엔 총소리, 여전히 땅 흔들려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아이티 지진으로 부상한 소년이 15일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임시 진료소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아이티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는 최대 20만 명으로 추산되고 포르토프랭스의 건물 대부분이 폐허로 변했다. [포르토프랭스 로이터=연합뉴스]

13일 오후 뉴욕을 떠나 대지진 피해의 중심지인 포르토프랭스까지 오는 데 만 47시간이 걸렸다. 공항이 마비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인간 문명의 한계를 절감한 시간이었다. 기자를 태운 지프는 15일 오전 10시(현지시간) 산토도밍고 시내에서 의약품을 싣고 출발했다. 아이티로 넘어가는 국경 도시 히마니까지는 외길이나 다름없는 도로였다. 달리는 도중 월드그레이스미션 김현철 선교사의 휴대전화로 카푸(아이티)에 있는 미국 선교사 로저 클락이 보낸 문자가 날아왔다. “어제도 길에서 잤다. 새벽 총소리에 잠을 깼다. 오전 5시 여진으로 땅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거리엔 시체가 즐비하다.”

외신들은 인구 1000만 명의 아이티에서 이번 지진으로 최대 20만 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자는 산토도밍고에서 6시간 남짓 달려 히마니에 도착했다. 주유소는 시끌벅적했다. 아이티에서 기름을 사러 온 사람들로 북적댔다. 지진 후 도미니카 정부는 히마니로 생필품과 기름을 사러 오는 아이티인에 한해 제한적으로 통행을 허용했다.

히마니부터 국경까지는 자동차로 30분 남짓, 간간이 검문초소가 보였다. 그러나 차량 통행은 거의 없었다. 도중에 산토도밍고에서 포르토프랭스(아이티 수도) 사이를 운행하는 고속버스 한 대가 타이어 펑크로 멈춰 서 있는 게 보였다. 구호요원이든 가족 생사를 위해 달려가던 아이티인이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도로 곁에 서 있었다.
히마니 국경검문소는 장마당처럼 혼잡했다. 철조망 앞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은 마스크를 끼고 있었다. 중장비와 트럭들이 연방 들락날락했다. 검문소 앞 광장엔 아이티에서 온 환전상과 통관 브로커가 장사진을 이뤘다. 국경을 통과시켜 줄 테니 수수료를 달라고 달라붙었다. 오토바이와 승용차를 가져와 가이드를 하겠다는 사람도 많았다.

기자 일행은 아이티행 구호물자 운반을 돕던 데다 주(駐)도미니카 주재 아이티 영사가 길을 안내해 국경이 문을 닫은 뒤였지만 그냥 통과할 수 있었다.

국경을 넘어선 뒤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도로는 대부분 비포장이고 가로등도 없이 캄캄했다. 30여 분을 달리자 민가가 나왔다. 발전기를 돌려 불을 밝힌 집이 제법 많았다. 지진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는지 무너진 집도 많지 않았다. 거리는 의외로 평온해 보였다. 노점상들이 잡화를 파는 모습도 보였다. 사람들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몰려나와 떠들며 몰려다녔다. 장작을 때 늦은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아낙도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지진 참사 현장과는 동떨어진 광경이었다.

그러나 포르토프랭스로 들어서면서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무너진 집이 많아졌다.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노숙을 했다. 언제 다시 지진이 일어나 건물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이었다. 오후 9시 넘어 거리에서 인터뷰를 하는 방송기자 모습도 보였다. “먹을 것도 희망도 없다. 온종일 먹을 것이라곤 사탕 하나뿐, 개울물을 떠먹고 길가에서 잤다.” 한 주민이 털어놓은 생활상이다.

공항엔 소형 프로펠러 비행기가 뜨고 내렸다. 공항 앞은 몰려든 인파로 가득했다. 다행히 우리 일행의 누군가가 가진 AT&T 미국 전화기를 통해 전화 통화가 가능했다. 동행한 현지 전문가는 현지 통신회사 한 곳이 회선을 복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선교단이 가져간 의약·식료품을 실은 트럭 3대는 유엔군(중국군)이 지키고 있는 소나피 공단 내 한국 기업 창고에 5만 달러의 의약·식료품을 풀고, 사람만 한국계 ‘아이티미션’ 선교회로 가서 묵기로 했다. 새벽까지 프로펠러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중국군 막사 옆엔 중국 신화통신이 캠프를 차려 놓고 있었다. 기자는 기사·사진을 송고하기 위해 AT&T와 신화통신의 신세를 져야 했다.

포르토프랭스=정경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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