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지명의 無로 바라보기] 자연에 순응할 수밖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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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20년 전 조오련이 단독 수영으로 일본까지 갔었다. 그때 코치에게 "20년 후에 다시 건너자" 고 약속했다고 한다. 한 방송사의 후원을 받으면서 여러 명이 교대로 헤엄쳐 20년 전의 약속을 지켰다.

알몸 수영으로 대한해협을 건너는 일은 쉽지 않았다. 첫번의 시도는 실패하고 두번째에 성공했다.

첫번째에 야간 기상조건의 악화로 도중에서 포기하려 하자 참가했던 대원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아쉬워했다. 이때 조오련이 그들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자연에 대해 겸손해야 돼. 자연이 거부하면 순응할 수밖에 없어. " 불경은 바다의 공덕을 열거하면서 우리 마음도 그렇게 만들라고 가르친다.

무한히 넓은 것, 썰물.밀물시간을 철저히 지키고 부패물을 밀어내는 것,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늘어나지 않고 가물어도 줄어들지 않는 것, 흘러 들어온 물에게 어느 강줄기에서 왔느냐고 과거를 묻지 않는 것, 짠맛이 평등한 것, 큰 파도가 아무리 높이 솟았다가 꺾어져도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 등이다.

불경의 가르침을 따라 바다로부터 배우려고 하다 보니, 나는 바다를 좋아하게 됐다. 그래서 대해를 건넌 이들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져왔다.

작은 돛단배를 타고 부산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까지 혼자서 항해한 김원일, 간호사로 독일인과 결혼해 딸과 함께 2년 동안 배를 타고 세계일주를 한 곽양희, 한 신문사의 후원을 받아 돛단배를 타고 지구를 돈 강동석 등이 먼저 생각난다.

저들이 각기 출판한 책을 읽었기 때문에 이름을 기억한다. 가슴아픈 사고도 있다. 러시아 동남부에서 뗏목에 돛을 달고 우리의 옛 조상들이 다녔던 뱃길을 탐사하려다 4명이 목숨을 잃었다.

나는 언젠가 돛단배를 타고 태평양으로 나가리라 작정하고 있다. 살아서 돌아오면 좋지만 죽게 되더라도 담담히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래도 살고 싶은 생각이 더 많아서인지 가장 성난 파도의 얼굴을 미리 보고 대비하려고 한다.

태풍 프라피룬이 제주도.흑산도.서해안 등을 뭉개버렸다. 수십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농어민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초속 58.3m나 되는 역대 최강풍의 힘을 받은 파도는 50m 높이의 바위를 뛰어 넘었고 방파제.등대.산중턱에 끌어 올려놓은 배들을 박살내 버렸다.

흑산도에서 바다를 바라본 이들은 파도의 크기가 너무 엄청나 바다인지 산인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농어민을 좌절케 한 저 태풍이 무척 원망스럽고 밉다. 단지 자위한다면 멀리 태평양으로 나가지 않고도 무서운 바다의 모습, 미쳐 버린 자연의 난행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카메라가 쉽게 잡을 수 없는 장면에 접할 수 있었고, 자연 앞에서 인간은 정말 미미한 존재임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바다를 포함해 자연 전체는 변덕쟁이다. 평소에는 아주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심술이 나면 변태적 난폭자가 된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시치미를 떼고 다시 잠잠해진다. 과학의 발달로 태풍이 이동하기 전에 그 발생지에서 중심축을 흩어놓을 수 있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나 그것은 먼 훗날의 일이다. 현재로선 자연이 이유 없이 광기를 부리더라도 그에 순응하는 것이 마음의 평화를 찾는 최선의 방법이다.

석지명 <법주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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