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송이선물과 한빛사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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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신문이 휴간한 지난 사나흘간의 추석연휴를 지배한 방송 뉴스는 북한 김용순(金容淳)비서의 전격적인 남한방문 및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송이버섯 선물, KBS방송의 '백두에서 한라까지' 생방송, 남한의 60여만t 대북식량지원 계획이었다.

그전까지의 주요 현안이던 한빛은행 부정대출 사건, 선거수사 축소 개입 의혹사건 등 정치현안은 완전히 실종상태였다.

*** '人治' 넘치는 남북관계

방송뉴스로만 보면 우리는 남북간의 화해와 통일 기운이 성큼 다가서는 이상적인 넉넉한 한가위 명절을 맞았다고 할 수 있다.

골치 아픈 현안을 떠올리지 않은 채 민족의 장래를 고즈넉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한 '김정일의 한가위 기획' 은 참신하다 못해 절묘하기조차 하며 이 점에서 김대중(金大中)정부는 또 한번 북측에 신세를 진 것으로 보인다.

북한 조선중앙방송은 "남측의 각계인사들과 남녘 동포들에게 북녘 인민들의 마음을 전하고 민족의 향취를 느끼게 하려는 장군님의 동포애의 정과 애족의 깊은 뜻이 어려 있다" 고 송이선물의 배경을 설명했다.

많은 사람들은 1인당 최소한 3백만원 이상의 송이버섯을 3백명에게 추석차례상에 올리도록 선물한 김정일의 마음 씀씀이를 접하고 "그는 역시 통큰 인물" 이라고 놀라워했다.

게다가 그 전달식만을 위해 인민군 대장을 서울에 보내 일각에선 "대포를 녹여 쟁기를 만들자" 는 뜻이 담긴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백두산과 천지의 비경, 태풍의 영향으로 남쪽에선 볼 수 없었던 한가위 둥근 달을 백두정상에서 잡아 남녘의 안방에서 보게 했던 환상적인 장면, 묘향산과 주요 고분 등 유적지를 우리의 눈앞에 펼쳐 보였던 KBS와 조선중앙방송의 합작이나 김용순의 제주.경주 등 방문에 이르면 평화와 화해의 기운이 한손에 잡히는 듯 했다.

누군들 흥감하지 않을 수 없는 흐름이다. 이 운기(運氣)를 잘 살리고 가꿔 나가 다시는 6.25나 아웅산 테러사건, 대한항공 폭파사건과 같은 민족 자해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남북 모든 민족 성원의 의무이자 소명이다.

그러기 위한 전제조건은 무엇일까. 구구한 방책이 제기될 것이지만 나는 남북 양측이 모두 법과 제도의 테두리 내에서 움직이는 사회체제의 확립이 선결요건이라고 생각한다.

남북간 화해의 초기단계라는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최근의 남북간 움직임이 지나치게 폐쇄적이고, 한쪽의 시혜적 결정과 입장에 좌우되며, 양쪽 지도자간 친분과 신뢰에 의존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김대중 정부 이후의 남북관계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제도적 접근이 절대적으로 긴요하다. 이는 국제적 신뢰획득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각종 회담일정이나 합의사항 및 행사가 김정일의 결단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인상은 단기적으론 그의 '광폭정치' 를 찬탄케 할지는 모르지만 길게 보면 남북관계의 불안정성을 드러낼 요인이 될 우려도 있다.

따라서 양측은 투명성을 최대한 발현하는 가운데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면서 법과 제도로 남북관계가 움직여지는 느낌을 갖도록 남북관계를 진전시켜야 한다.

'애족의 깊은 뜻' 이 담겼다는 송이선물도 서로간의 합의에 따른 법과 제도로 남북관계가 순항할 때에야 더 빛을 발휘할 것이다. 그래야 남북이 힘을 모아 통일되는 날 그야말로 '강성대국' 의 초석을 마련할 것이 아닌가.

*** 법.제도로 움직여야 안정

이러한 남북관계의 진전을 유도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내부부터 법과 제도가 지배하는 기풍을 우선적으로 확립할 필요가 있다.

올해의 유력한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거명되는 金대통령의 발목을 잡는 근자의 여러 추문과 사건은 혐의사실의 진위를 떠나 대통령의 핵심측근들이 관련돼 있다.

당사자들은 부인하지만 한결같이 법과 제도를 뭉개고 압력을 가하려 했다는 혐의다. 이러니까 일개 장관을 헌법에도 없는 '부통령' 이라고 지칭하는 말이 나오도록 한 것이 아닌가.

노태우(盧泰愚)정권의 '황태자' 박철언(朴哲彦), 김영삼(金泳三)정권의 '소통령' 김현철을 연상시킨다.

통일조국은 인치(人治)가 사라지고 법과 제도가 지배하는 남북한 사회를 모태로 건설돼야 한다.

이수근 <통일문화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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