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에 소박함 추구 주장한 '새로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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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들은 아주 적은 돈으로도 가질 수 있다. 필요 이상의 것들만이 비용이 많이 든다.' - 한 독일 의사.

극과 극은 서로 공존하기 마련인 모양이다. 한쪽에서 '자유를 얻고 싶다면 돈을 벌어라' 고 부추기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돈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소박함을 추구해야 한다' 고 주장하니 말이다.

독일 저널리스트인 레기네 슈나이더가 쓴 '새로운 소박함에 대하여' 는 후자에 속하는 책이다.

여기서 '소박함' 이란 과시적 소비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더 새롭다, 더 편리하다는 이유로 한사람이 평생 1만여 가지나 되는 상품을 소비하지만 슈나이더는 이런 건 '비곗살 같은 삶' 이라고 말한다.

슈나이더는 이미 사치가 대중화한 사회에서 과소비는 더이상 소비자들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며, 오히려 소비욕구를 하향조정하는 것이 요즘의 추세라고 말한다. 아끼는 것, 즉 '소박함' 이 새로운 가치관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소비가 미덕인 시대에 웬 구닥다리같은 발상이냐고 거부감을 느끼는 독자도 분명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소박함에 대하여' 는 단순히 돈을 아끼라고 충고하면서 돈의 가치에 반기를 드는 책이 아니라, 소비를 이 시대의 화두인 느림이나 환경문제와 연관해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깊이와 트렌드를 양손에 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소비는 곧 속도의 문제다. 소비를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반대로 소비를 하지 않으면 시간을 번다.

이런 의미에서 트렌드 연구가 마티아스 혹스의 말처럼 '소박함은 속도를 줄이려는 경향' 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엔 사치라고 하면 물질적인 풍요를 떠올렸지만 우리 시대의 사치는 물질적 풍요를 얻기 위해 잃어버렸던, 아니 파괴했던 휴식과 여가.게으름.느림.환경같은 것들을 의미한다.

이 사치를 누리려면 소비를 절제할 수 밖에 없고, 소비를 줄이는 것은 속도를 줄이는 것, 즉 느림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

사실 지금까지 많은 산업사회 구성원들은 '시간은 돈' 이라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에 지나치게 억눌려 지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서 아껴쓰느라 시달리는 것은 물론 여가시간마저 스스로 '빈둥거린다' 는 죄책감에 스트레스를 받아왔다.

하지만 이제 '느림' 이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면서 '슬로비' 들이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슬로비는 느리지만 일은 더 잘하는 인간 유형을 가리킨다. 슬로비들은 '느리게 갈 때 더 빨리 도달한다' 는 생각으로 마치 속도에 저항이라도 하듯이 마냥 느긋하게 일을 처리한다.

구매욕을 채우기 위해 더 많이 벌어야 하고, 더 많이 벌기 위해 더 많이 일해야 했던 과거형 인간들과 달리 슬로비를 비롯해 느림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거꾸로 가급적이면 일을 적게 해 나만의 시간을 번다. 그 결과로 주머니가 얇아지면 그에 맞춰 소비절제를 한다.

이같은 소비절제는 본인이 의도했든 아니든간에 환경보호와도 맥이 닿는다.

1993년 독일에서만 3백80만톤의 쓰레기가 소각됐고, 매년 1억3천만개의 전기제품이 폐기처분된다.

여기에는 물론 못쓰게 망가진 것들도 있지만 대개는 구식 스타일이라는 이유로 멀쩡한 물건들이 버려진다.

아 무도 낭비되는 자원과 에너지, 주변에 쌓이는 쓰레기더미를 심각하게 염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소박함의 트렌드가 확산되면 이런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있는 물건을 아껴씀으로써 지구를 훨씬 덜 더럽힐 수 있다.

여기서 한가지 확실하게 말해둬야 할 것은 소비를 덜 한다고 해서 꼭 돈을 덜 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소박함과 싸구려는 전혀 다르다. 소박함을 쫓는 사람들은 쉽게 못쓰게 되는 값싼 물건보다 비싸더라도 오래쓰는 물건이 결국 더 이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이미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 청결한 자연은 부자들만 누릴 수 있는 사치로 자리잡았다.

결국 소박함의 라이프 스타일은 지난 시절의 과시적 소비만큼이나 성취하기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들며, 또 그만큼 선망의 대상인 셈이다.

이런 면에서 봤을때 질좋은 물건과 무공해 채소를 사고 좋은 환경을 누리기에는 돈이 턱없이 부족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 소박함의 유행은 사실 전혀 새로울 게 없다.

다만 완전히 두 계층으로 나뉘어 있던 빈과 부의 두 세계가 소박함이라는 한 지점에서 접촉점을 찾을 수는 있다.

거금을 기부하는 것으로 빈자들에게 할 일 다했다고 홀가분해 하던 부자들이 전에 없던 여유시간을 갖게 됨으로써 내가 가진 것을 베풀고 다른 삶을 위해 뭔가 실천할 수 있다면 말이다. 바로 이게 새로운 소박함의 풍조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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