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국치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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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10년 8월 4일,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은 자신의 측근 이인직(李人稙)을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小松綠)에게 보내 일본의 합방의사를 재차 확인하고 조속한 합방을 제의했다.

이인직은 '혈(血)의 누(淚)' 로 유명한 친일파 신소설 작가로 고마쓰의 도쿄정치학교 후배였다. 고마쓰는 이날의 일에 대해 훗날 '조선병합(倂合)이면사' 라는 저서에서 '그물을 치기도 전에 물고기가 뛰어들었다' 고 표현했다.

저널리스트 윤덕한(尹德漢)의 '이완용 평전' 은 지금부터 꼭 90년 전인 1910년 8월 29일에 한일합방이 공식 선포되기까지 국치(國恥)의 나날을 담담히 적고 있다.

8월 22일에는 합병조약이 조인됐다. 순종은 나흘 후인 26일 이완용에게 최고 훈장인 금척대수훈장을 수여하는 등 신하들에게 골고루 '훈장잔치' 를 베풀었다.

대신.황실종친의 부인부터 상궁까지 여인들에게도 훈장복이 터졌다. 합방공포 직후엔 일제가 나서서 대사면령을 내리고 전국의 왕족.원로유생.효자.효녀 등 8만9천8백여명에게 총 3천만엔을 뿌렸다.

이완용 같은 친일파의 '활약' 으로 다소 시일이 앞당겨졌을 뿐 일제는 오래 전부터 합병을 기정사실로 삼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일본학자 야마베 겐타로(山邊健太郞)의 '일한병합소사' 는 군대이동 등 여러 정황을 들어 일제가 9월까지는 합병을 단행할 계획이었다고 보았다.

지방의 일본군이 서울 용산기지에 속속 집결한 결과 조인식이 있던 8월 22일엔 시내에서 두 사람이 만나 이야기를 나눠도 헌병의 검문을 받을 정도였다. 문제는 조약이 '대한제국 황제의 합병 요청을 일본제국 황제가 수락' 하는 내용이라는 점이다.

전후사정으로 보아 억지합병이 명백한데도 일본은 지금도 이 '형식' 에 집착하고 있다. '한일합방은 유효했다' 는 것이 일본의 공식 입장이다. 사회당 출신의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전 총리마저 5년 전 총리재임 때 "일한합병조약은 법적으로 유효했다" 고 말했다가 한국이 반발하자 "당시 양측은 평등한 입장이 아니었다" 고 해명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합병의 가장 큰 책임은 나라를 지키지 못한 대한제국과 정치 엘리트들에게 있다고 보는 편이 낫다.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국치일은 일년에 하루로 족하다.

노재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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