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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물러서기의 위대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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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히말라야의 사나이 엄홍길은 가끔 북한산도 오른다. 여느 등산객과 마찬가지로 간단한 배낭 차림이다. 백운대까지 8백36m, 에베레스트의 10분의 1에 불과한 높이다.

그렇다면 엄홍길은 날다람쥐처럼 뛰어서 오르지 않을까. 높이도 그러려니와 험준한 히말라야를 오르내린 그에게 북한산은 평지나 다름없지 않을까. 한데 그의 이야기는 다르다. 수많은 등산객이 그를 앞질러 올라간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산을 오른다. 어떤 이는 콧노래를 불러가며 쉬엄쉬엄 오른다. 계곡이라도 만나면 꼭 등산화를 벗고 발을 담근다. 그런가 하면 문득문득 시계를 보며 오르는 사람도 있다. 깔딱고개 중간쯤에 널찍한 바위가 있어도 쉬지 않는다. 뭐, 술병을 차고 올라가는 이들도 있다.

각각의 등산법은 다르지만 공통점은 있다.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뻐근한 팔다리로 숨을 헐떡이며 오르지 않고서는 계곡물의 시원함도, 정상의 상쾌함도, 여름날의 정취도 맛볼 수 없다.

엄홍길에게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실존을 느끼는 공간이다. 입김마저 얼려버리는 만년설과 빙하, 폐가 찢어질 듯이 희박한 산소, 깊이 모를 섬쩍지근한 크레바스를 직면하며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을 로프 하나에 걸고 자신을 던진다. 그래서 그의 히말라야 14좌 정복여정의 마지막 순간, K2에 우뚝 선 모습은 아름답고 경이롭다.

그러나 엄홍길이 진정 위대한 것은 정상에 올랐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오르기를 멈추고 물러설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1988년 세계의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에 오르기까지 두차례 물러섰다. 85년과 86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도전했으나 눈보라 때문에 7천여m에서 되돌아왔다.

안나푸르나에선 89년부터 모두 네차례의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98년에는 셰르파 두 명을 구하려다 자신의 발목이 부러져 72시간 사투끝에 생환했다.

그는 "산은 또 오를 수 있지만 셰르파의 목숨은 하나뿐" 이라고 했다. 결국 이듬해 99년 다시 도전해 등정에 성공한다.

정상을 눈 앞에 두고 물러서기란 쉽지 않다. 몇 걸음만 더 가면, 눈보라를 조금만 더 견디면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 친지와 스폰서의 기대에 찬 얼굴도 떠오른다. 여기서 다음을 기약하기란 정말이지 어렵다.

하지만 엄홍길은 해냈다. 히말라야의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을 때 그는 '포기' 라는 위대한 결정을 내렸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다. 그래서 산 속에 파묻히지 않고 14좌 완등의 위업을 이룩했다.

지금 의료계는 '완전한 의약분업' 이라는 고봉준령을 오르고 있다. 넘어야 할 봉우리는 여럿이다. 수가 현실화, 대체조제 제한, 임의조제 금지, 전공의 대책…. 이중 몇 개는 이미 넘었다. 베이스 캠프도 설치했다. 한데 의료계는 국민의 성난 '눈(目)보라' 를 뚫고 기어코 모두 오르려 한다.

어떤 등산법이 더 나은지 모른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파란 하늘과 흰 구름, 색색의 꽃을 바라보며 정취에 젖더라도, 정상을 밟지 못한다면 등산이라고 부르기가 좀 멋쩍다.

반면, 정상에 올라 '야호' 를 외쳤더라도 앞사람 뒤꼭지만 보면서 올랐다면, 그래서 소리내어 흐르는 계곡과 길섶에 함초롬히 핀 야생화를 보지 못했다면 이 또한 진정한 등산이 아니다. 더욱이 동반자이자 셰르파이자 포터인 국민을 희생하고 오른 정상이라면 그 어떤 고봉준령인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히말라야를 정복한 엄홍길은 이제 피안의 대륙, 남극의 최고봉 빈슨매시프로 떠난다. 우리 의료계는 언제쯤 의학의 최고봉 '히포크라테스' 로 떠날까.

박종권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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