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스타 김제경 '아름다운 퇴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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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후배들의 경기를 지켜보는 그의 가슴속에 눈물이 맺혔다.

태권 도복을 입은 지 꼬박 20년. 지금까지 줄곧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한번 따보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그러나 올림픽 44일을 앞두고 그는 매트를 떠났다.

한국 태권도의 간판 김제경(31.에스원)이 시드니올림픽 출전권을 포기했다. 김은 2일 오전 태릉선수촌에서 열린 태권도 남자 +80㎏급 재평가전에서 기권, 시드니행 티켓을 후배 김경훈(25)에게 물려줬다.

김은 고질적인 허벅지 부상에 시달려 왔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때부터 시작된 통증이었다.

때론 서있기조차 힘들었지만 진통제를 맞아가며 훈련에 매진했다. 허벅지 부상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7월 크로아티아에서 열린 올림픽 세계예선대회에서 당당히 출전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올들어서도 회복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지난 4월 올림픽 국가대표 최종 평가전에서는 후배들의 양보로 간신히 대표 자격을 따냈다. 부끄러움을 벗기 위해 그는 '부상에서 회복되지 않을 경우 시드니출전권을 포기하겠다' 는 약속을 하고 피나는 재기에 돌입했다.

태릉선수촌 대신 경기도 용인시 수지에 있는 스포츠센터에서 매일 물리치료.마사지.수영 등을 반복하며 몸 만들기에 힘썼다.

한밤중에도 웨이트 트레이닝과 하체 보강 훈련을 계속하며 자신과 고독한 싸움을 벌였다. 지난달 유럽 전지훈련도 무리없이 소화해 부활이 눈앞에 다가와 보였다.

그러나 욕심이 앞선 탓일까. 그는 3주전 오른쪽 허벅지 근육 파열이 재발, 근육이 뭉쳐 찢어지는 증상이 나타났다.

전문의도 "완쾌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고 진단했다. 더 이상 훈련을 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지난 주말 대한태권도협회에 올림픽 출전권 반납 의사를 밝혔다.

김제경의 태권도 경력은 화려했다. 91년 태극마크를 단 뒤 세계선수권대회 3연패, 94.98아시안게임 2연패, 아시아선수권대회 3회 우승 등.

그는 태권도 최초로 그랜드 슬램(아시아선수권.아시안게임.세계선수권.월드컵 우승)을 달성해 세계 태권도의 신화적인 존재였다. 1m87㎝로 헤비급으로서는 그다지 크지 않은 체격이었으나 오른발 돌려차기와 왼발 뒷차기는 전광석화같았다.

빅토르 에스트라다(멕시코) 등 헤비급 라이벌들이 그를 피해 체급을 낮추는 일이 속출했다. 세계 무대에서 '+80㎏급' 은 '김제경 체급' 으로 불렸다.

그는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으나 당시는 시범종목이었다. 그래서 그는 30이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태권도가 정식 종목으로 처음 채택된 이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영광스런 은퇴를 하려 했었다.

"후배들이 제 몫까지 충분히 해줄 것이라 믿습니다. "

물러나야 할 때를 스스로 알고 있던 그였지만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발걸음은 유난히도 무거워 보였다.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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