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배 칼럼] 날치기 방지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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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 국회의 날치기는 고질병이 아니라 불치병인 모양이다. 군사정권때부터 50회 가까운 각종 날치기가 있었는데 이제는 사라질 때도 됐건만 문민정부도 그 악습을 벗어나지 못했고 국민의 정부라는 이번 정권도 예외가 아니다.

16대 국회는 낙선운동이란 시련도 거쳤고 386세대인가 하는 의원들이 큰소리를 쳐 달라지나 했으나 여전하다.

오히려 386의 맏형쯤에 해당하는 의원이 날치기의 주역이었고 날치기 직후 열린 여당 의원총회는 그 무용담으로 전우애를 다지는 판이었다.

*** 날로 교묘해지는 수법들

날치기 하던 날의 신문기사들을 보면 회의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채 소란속에 끝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막상 위원회 임시회의록은 사회권을 넘겨받는 절차도 없이 천정배(千正培)위원장 대리가 개의를 선언하고 국회법 개정안을 상정한다.

그리곤 "제안설명과…(장내소란)심사보고는 유인물로 대체하고 토론은 생략하고…(장내소란)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라고 기록돼 회의가 어렵게나마 모양을 갖춘 것처럼 꾸며져 있다. 날치기는 한마디로 여당의 변칙과 불법을 국회사무처가 합법화시키는 짜고 치는 해프닝이다.

날치기는 사후 합리화를 위해 몇가지 '현장증명' 과 '격식' 이 필요하다. 우선 의결정족수 만큼의 의원숫자가 확보돼야 한다. 잠을 자든, 잡담을 하든 현장근처에 있어야 한다.

반드시 증인이 있어야 한다. 속기사와 의사과 직원은 변칙 합법화작업을 위해 반드시 참석시킨다. 3선개헌 같은 큰 일을 벌일 때는 기자 몇명을 참여시켜 목격자로 만들었다.

의사봉 같은 소도구도 필요하다. 의사봉을 꼭 세번 두드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변칙이므로 오히려 더 격식을 갖추는 것이다.

그래서 날치기를 시작하려면 누군가의 속주머니에 의사봉을 숨겨다닌다. 이번에는 의사봉을 뺏겨 누군가가 널빤지를 갖다대서 손바닥으로 내려쳤다는 것이다.

날치기는 국회 경내에서 이뤄져야 한다. 어떤 때는 국회도서관에서, 어떤 때는 상임위의 문을 걸어잠가놓고 일을 벌이기도 하고 의원총회를 한다며 해치우기도 했다.

국회의장이 본회의장 한쪽 문에 슬쩍 한 발만 들여놓은 채 국회경비원들에 둘러싸인 채 전광석화처럼 해치운 일도 있고 국회기자실에 올라가 무선마이크로 날치기를 한 적도 있다.

그러니 본회의 날치기를 막으려면 사회권을 쥔 국회의장을 맨투맨으로 붙들어매는 사태가 빚어지는 것이다.

날치기를 하기로 작심하면 대체로 성공한다. 93년 예산안 변칙처리 때 황낙주(黃珞周)의장이 개의를 선포하다가 급소를 찔려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되는 바람에 통과되지 못한 것이 거의 유일한 실패사례다.

많은 정치학자들과 덕망 있는 인사들은 날치기를 근절하기 위해 의원들은 소신투표를 하라느니, 대화와 타협을 하라느니 점잖은 대안들을 내놓는다.

그러나 우리네 투표방식이 정당패거리 투표인데 공천권을 당총재가 몰아쥐고있다시피한 DJ당, JP당, 회창(會昌)당에서 누가 돌출행동을 하겠는가.

선진국에서도 당론과 다른 투표를 하면 '배신자' 낙인이 찍히고 제재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정치는 민주화되어도 당은 독재화된다는 것이 모리스 뒤베르제의 말이던가.

기술적으로만 말한다면 날치기를 막으려면 표결방식을 바꾸면 된다. 국회법에는 의사의 결정은 기립, 거수, 기명.무기명.호명투표, 전자투표와 '이의 유무를 묻는 법' 이 있다.

이의유무를 묻는 방법은 응답의 강도(强度)로 가결여부를 측정하는 것이어서 전원의 이의가 없을 때 사용하는 사실상의 만장일치법이다.

그러므로 서로 대치되는 의안의 결정에 이 방법을 사용한 것은 사실상 국회법 위반이며 따라서 무효다. 이 이의유무를 묻는 법을 없애면 일단 날치기를 하기는 어렵다.

*** 野 합법투쟁 길 열어줘야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야당의 반대투쟁을 인정하고 제도화하는 것이다. 만약 점잖게 투표하면 우리처럼 패거리투표하는 나라에서는 소수당은 백전백패다.

한쪽은 계속 이기고 다른 쪽은 지기만 한다면 소수의견은 어떻게 되며 반대주장이 설 땅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필리버스터와 같은 지연전술도 인정하고 편승입법제 같은 것도 도입해야 한다. 예컨대 의석 50석이 넘는 정당에만 정치자금을 배분하도록 하는 정치자금법 개정안을 만들어 국회법 개정안에 편승시켜 국회법을 강행하면 정치자금법 개정안도 함께 통과시키는 결과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아무튼 야당의 합법적인 반대투쟁이 가능하도록 열어놓는 관용과 인내의 정신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만약 3선개헌과 같은 무리수라도 쓰려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우리는 야당에게 물리적 투쟁을 기대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김영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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