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성길 '상대성이론'] 길은 막혀도 마음만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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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손자들은 지금쯤 출발했을까."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에 사는 이순례(88) 할머니는 벌써 마음이 설렌다. 증손자 또래의 동네 꼬마(박준재.8)를 불러 꼬옥 안아본다. 한가위, 고향, 어머니. 이것으로 충분하다. 오늘부터 며칠간 다른 말은 필요 없다. 양평=권혁재 기자

서울에 사는 회사원 김씨(39.성북구 삼선동)의 고향은 대구. 추석 연휴에 승용차로 가려면 많게는 13~14시간, 운이 좋아도 8~9시간은 걸린다. 그러나 그는 이 길을 세 시간 이상 단축하는 비결을 갖고 있다.

귀향하기 전날 김씨는 혼자 승용차를 몰고 수원으로 달린다. 그리고 전철 1호선 종점인 병점역 부근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전철을 타고 집에 돌아온다. 출발 당일엔 부인(37).아들(11).딸(8)과 함께 집 근처 혜화역(4호선)에서 지하철에 오른다. 서울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탄다. 명절 연휴의 전철은 의외로 한가하다. 병점역까지 걸리는 시간은 고작 한 시간 남짓. 주차장에서 차를 찾아 가족을 태우고 1번 국도에 오른다. 안성이나 천안쯤에서 경부고속도로에 오르면 고향 가는 길이 한결 빠르고 편하다. 한남대교~경부고속도로~수원까지 걸리는 서너시간을 절약한 덕분이다.

물론 출발 전날 승용차로 병점역에 가다가 '진짜' 귀성 차량에 파묻혀 고생한 해도 있다. 하지만 김씨는 "내가 조금만 힘을 들이면 가족들은 편안하게 갈 수 있지 않으냐"며 밝게 웃는다. 그렇다. 추석은 역시 마음이다. 가족 위하는 마음, 어른 받드는 마음, 옛친구 반기는 마음이다. 대구든 광주든 부산이든, 모든 고향은 그런 마음들을 푸근하게 풀어놓는 우리들의 쉼터다. 회사원 김씨가 아름다운 것도 교통체증을 피해가는 지혜보다는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씀씀이 때문이다.

오래전 영국의 한 신문이 "어떤 길이 런던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인가"라는 현상 퀴즈를 냈다. 당선작은 뜻밖에 '좋은 친구와 함께 가는 길'이었다. 1921년 미국을 방문한 아인슈타인에게 한 기자가 "상대성 이론을 한마디로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아인슈타인이 대답했다. "아름다운 여인과 공원에서 데이트한다고 생각하면 한 시간이 1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뜨거운 난로 위에 앉아 있다면 1분도 한 시간 같을 것이다. 그게 바로 상대성 이론이다."

추석 연휴가 시작됐다. 길은 어차피 막히고 밀린다. 다 같은 처지라 남 탓할 일도 아니다. 이왕 막히는 길, 마음만은 즐겁게 갖자. 차들이 끝 간 데 없이 꼬리를 물고 가다 서기를 반복해도, 차 한 대 한 대에 담긴 설레는 마음, 고운 마음들을 상상해보자. 각박한 일상에서 모처럼 벗어나 고향의 어머니에게 달려가는 착한 이들의 행렬에 축복을 보내자. 좀 더디면 어떤가. 마침 이번 추석엔 푸근한 보름달도 볼 수 있단다.

노재현 기자
양평=권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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