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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샤오만과 뜨거웠던 시인, 링수화에게 ‘비밀’을 털어놓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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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호 33면

1927년 9월 30일 발행된 양우화보(良友畵報)에 ‘쉬즈모 부인’으로 표지를 장식한 루샤오만. 김명호 제공

1924년 5월 29일 타고르는 쉬즈모와 함께 상하이를 떠났다. 상황을 파악한 량치차오는 량스청과 린후이인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 아들과 며느릿감, 쉬즈모 모두 상처받기를 바라지 않았다. 3개월 후 부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아들에게 알리지 않았고 린창민이 흉탄을 맞고 숨졌을 때도 린후이인의 귀국을 말렸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45> 타고르와 쉬즈모의 연인들

중국을 떠난 타고르는 쉬즈모와 2개월간 일본을 여행했다. 홍콩에서 헤어질 때 이듬해 봄 유럽에서 다시 만나자며 ‘쑤어스마’라는 인도식 이름을 지어 줬다. 그동안 링수화는 일본과 홍콩에서 날아온 쉬의 편지를 48통 받았다. 까막눈이 아닌 다음에야 쉬즈모의 편지를 받고 나가떨어지지 않을 여인은 중국 천지 어느 구석에도 없었다.

귀국한 쉬즈모는 툭하면 링수화를 불러냈다. 도도하기 이를 데 없던 링이었지만 상대는 당대 최고의 서정시인이었다. 두 사람은 주로 베이하이(北海) 공원을 산책했다. 링은 쉬로부터 온갖 얘기를 다 들었다. 얼떨결에 했던 결혼과 이혼, 런던 시절 린후이인에게 품었던 감정, 왕껑의 부인 루샤오만과의 관계 등이 주된 것이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어처구니없는 내용들이었지만 쉬의 입에서 나오다 보니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시(詩)였다. 이성적이었던 링은 천위안(陳原)과 사귀기 시작했다. 어찌나 감쪽같았는지 주변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25년 3월 쉬즈모는 베이징대에 사직원을 제출하고 유럽 여행을 준비했다. 타고르와 약속도 있었지만 루샤오만과의 애정 행각이 온 장안에 퍼져 있다 보니 그 압력을 견딜 재간이 없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일에는 여자들이 더 대담해지는 법, 루는 “왕껑과의 문제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나가 있어라”며 쉬의 등을 떠밀었다.

1946년 유엔 대표로 부임한 남편 천위안과 함께 중국을 떠난 링수화는 89년 12월 50여 년 만에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베이하이 공원에서 마지막 나들이를 하고 엿새 후 세상을 떠났다.

출국 전 쉬즈모는 루샤오만 몰래 가죽상자를 들고 링수화를 찾아갔다. “루샤오만이 보면 곤란한 것들이야. 내겐 가장 중요한 보물이니까 보관하고 있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내 전기를 써 줘. 팔보상(八寶箱)이거든.” 링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후스(胡適)는?” 쉬는 씩 웃었다. “하여간 딴 놈들은 절대 보여 주지마 너만 봐.” 팔보상 안에는 쉬가 지인들과 주고받은 서신과 생각날 때마다 써 뒀던 시와 산문의 수고(手稿)가 들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런던 시절 린후이인에게 빠져 있을 때 영문으로 쓴 2권 분량의 ‘케임브리지(Cambridge) 일기’와 22년 11월 이혼 서류를 들고 귀국했지만 린이 획 돌아선 뒤 실연의 아픔을 기록한 일기였다. 루샤오만을 만나기 전에 일어났던 일들이지만 루가 보기라도 하는 날에는 “내가 대용품이냐”며 무슨 큰 난리가 벌어질지 몰랐다.

쉬즈모는 4개월간 유럽과 소련을 떠돌아다녔지만 루샤오만과의 관계는 식을 줄 몰랐다. 우여곡절 끝에 26년 10월 3일 베이하이 공원에서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량치차오와 후스가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루샤오만은 음력 9월 19일, 관세음보살의 생일날 태어났다. 어릴 때 별명이 ‘꼬마 관세음보살(小觀音)’이었다. 학생 시절 그의 유화를 구입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 프랑스인이 많았다. 국제사회에 ‘웰링턴 구(Wellington Koo)’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중국의 제1세대 외교관 구웨이쥔(顧維鈞)에 의해 18세 때부터 3년간 외교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구로부터 “루샤오만의 부친을 보면 눈·코·입 어디에도 총명한 구석이라곤 단 한 군데도 없다. 저렇게 영리하고 예쁜 딸이 태어난 것을 보면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화가 류하이쑤(劉海粟)는 “시(詩)는 명청(明淸)대의 문인들과 견줘 손색이 없고 자태는 신의 조각품과 같다”는 말을 자주 했다. 쉬즈모가 후스와 선충원(沈從文)에게 “우리는 입으로 말하지만 루샤오만은 눈으로 한다”고 하면 다들 동의했다. “남자는 메이란팡(梅蘭芳), 여자는 루샤오만.” 이건 상식이었다.

쉬즈모는 31년 11월 19일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만주를 일본군에 점령당한 지 2개월 만이었다. 시인 쉬즈모의 위력은 대단했다. 신문마다 “중국은 성 한 개를 또 잃었다” “중국의 문화계가 무자비하게 폭격당했다”고 보도했다. 전국적으로 추도회와 시 낭송회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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