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연구기관 정체성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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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책연구기관들이 정체성(正體性)위기에 빠져드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국책연구기관들은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 시대에는 정부와 호흡을 맞춰 경제발전에 일익을 담당하면서 예산지원도 톡톡히 받았다.

그러나 민간 주도 경제환경을 맞아 위상과 기능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으며, 정부의 간섭에 연구기관 내부 갈등까지 겹쳐 연구종사자들의 반발이나 이탈이 늘고 있는 것이다.

연구원들의 일차적 불만은 연구의 자율성이 너무 무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금융연구원은 최근 금융구조조정을 위해선 국회 동의를 얻어 공적자금을 추가 조성하는 정공법을 써야 한다는 보고서를 만들었다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정부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해 하반기 경제전망 보고서를 내면서 이미 인쇄된 내용중 '선제적 금리인상' 이란 부분을 일일이 지운 후 배포해야 했다.

국책연구기관의 한 연구위원은 "정부의 예산지원을 받기 때문에 연구주제의 선정 자체는 정부와 사전 협의하는 게 당연하다" 며 "그러나 결과를 훼손해서는 연구원들이 소신껏 일하기 힘들다" 고 강조했다.

정부는 1998년 국책연구기관들의 연구 자율성을 보장하고 경쟁체제를 도입하기 위해 각 부처 산하에 있던 기관들을 총리실 산하로 재편했다.

그러나 연구를 직접 발주하는 정부부처들의 입김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고 연구원들은 지적한다.

연구기관장과 박사급 연구위원들간의 갈등도 나타나고 있다.

한 연구기관장의 경우 연구위원들에게 현 경제팀의 정책방향을 비판하는 연구를 요구하는가 하면, 개각의 필요성과 함께 구체적인 입각 대상 인물까지 거론하는 정치색 짙은 보고서를 청와대에 제출한 것이 드러나 내부 연구원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산업연구원(KIET)은 원장이 성희롱 추문에 휘말려 중도 퇴진하는, 유례없는 소동까지 발생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연구원들의 이탈이 잇따르고 있다. KDI의 경우 부원장을 지냈던 엄봉성 선임연구위원이 벤처기업으로 떠났고, 구본천.강영재.김승진 연구위원은 외국계 컨설팅회사로 전직했다.

금융연구원 관계자는 "최근 2년새 연구원을 떠난 박사가 전체의 3분의1에 달한다" 고 전했다.

국책연구기관 관계자는 "연구기관 통폐합 등 외형적인 수술까지 거론 될 정도로 국책연구기관들의 분위기가 침체돼 있다" 면서 "연구기관의 위상과 기능을 재점검, 기능을 살려갈 연구기관이라면 연구종사자들이 보수는 적더라도 보람과 비전을 갖고 일할 수 있도록 보장해줘야 한다" 고 강조했다.

김광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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