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엔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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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TV에 우리네 7080세대를 위한 음악프로그램이 있다. 거기서 유명한 트로트 가수가 ‘언체인드 멜로디’라는 추억의 팝송을 멋지게 소화한 적이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열창을 하던지 무심코 켜놓은 TV 쪽으로 절로 몸이 향했다. 편히 서서 일상적인 얼굴로 노래 부르고는 곡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감사합니다” 외쳐서 여운을 깨는 다른 가수들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그녀는 창법의 기교와 함께 표정과 몸짓도 노래에 완전히 몰입되어 관객들마저 함께 휘몰아 가는 것이었다. 그런 후 풍부한 성량으로 피날레를 장식하고는 반주의 마지막 소절이 끝날 때까지 그 여운을 그대로 잡고 놓질 않았다. 몇 초 후에야 관객들의 엄청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공연에서의 이러한 엔딩의 감동은 때론 퍽 강렬하다. 김연아 선수의 피겨스케이팅 ‘죽음의 무도’에서도 혼신의 힘을 다한 스핀 후 드라마틱하게 정지된 엔딩 3초는 고혹적 표정과 더불어 압권을 이룬다. 그때 치켜든 팔을 너무 빨리 내려버려도 맥 빠지고 너무 오래 들고 있어도 멋없어진다. 그녀는 격정적 공연 뒤의 정지된 3초가 주는 흡인력을 아는 것 같다. 그 숨을 멈추게 하는 엔딩은 관객의 기립박수를 분출시키는 힘이 있는 것이다.

관객을 몰입시키고 혼연일체가 되도록 하는 감동의 힘은 뭣보다도 공연하는 이들의 실력일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무대를 쥐고 흔드는 카리스마,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순발력, 또한 혼신의 힘을 다한 최선일 것이다.

올 한 해도 바야흐로 엔딩을 재촉하고 있다. 젊은이든 나이 든 이든, 이 무렵에는 뭔가 한 해를 되짚어 보고 내년을 기약하기 마련이다. 올해는 내게, 그리고 우리 사회에 어떤 감동이 있었을까. 사실 정치는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으로, 희망적 흡인력으로 때론 어느 공연 못지않은 감동을 만들어 내곤 한다. 특히 선거는 늘 유권자들의 엄정한 의사를 일깨우며 한 편의 멋진 반전 드라마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선거 이후의 정치과정에서는 국민을 감동시키는 장면이 많질 않다. 그 정도가 아니라 실망을 안겨주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2009년을 돌아보면 정쟁과 분규로 또 경제위기로 사람들이 화나고 힘들고 한 시간이 많았던 것 같다. 국회는 지금도 예산안 줄다리기 중이다. 세종시, 4대 강 문제로 논의가 시끄럽더니 다시 예산안으로 대치 중이란다. 우리의 정치에는 왜 논의가 없고 늘 투쟁과 대치만 있을까. 다른 나라들도 다 이러고 사나 싶을 때가 있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지지를 얻어야지 상대당의 지지를 얻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과 토론하지 않지요”라는 현직 의원의 말은 이러한 현상을 설명해 준다. 개인적으로는 다툼을 싫어해 제발 2010년부터는 길에서나, 정치에서나, 법원에서나 싸움 좀 없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직업적 성격상 법적 분쟁이 사라진다면 생계를 걱정해야 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국회가 싸우니 요즘은 웬만한 회의에서는 소리치고 다투다가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 거리투쟁하고, 기자회견을 자청하곤 하는 모습을 많이 본다. 이러다가 이런 모습이 특유의 회의문화로 자리 잡는 건 아닌지 염려스럽다.

넓은 땅, 많은 인구로 약진하는 이웃나라 주석은 미국을 방문해서 “높은 돛 곧게 달고 너른 바다 건너리라”며 미래를 장담하는 이 시기에, 우리는 이러다가 기회를 잃으면 어쩌나 안타까운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올 한 해의 마지막 시점에 반가운 소식이 하나 들려 왔다. 현대자동차 노사가 무분규 임금단체협상의 잠정합의를 이끌어 냈다는 것이다. 15년 만의 무파업이라고 한다. ‘분규 없는 노사합의가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다. 현실에서 보는 멋진 엔딩이란 이런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이런 소식에 고무되어선지 내년엔 좀 이랬으면 하는 작은 일들이 꿈처럼, 희망처럼 스쳐간다. 싫어도 예의 지키기, 슬퍼도 점잖기, 가난해도 품위 있기, 보수 측 사람도 한겨레 보기, 진보를 표방하는 이도 중·조·동 읽기, 어느 여대생이 “키 작은 사람은 루저”라고 해도 내가 루저가 아니면 흥분하지 않기.

한 해를 마무리하며, 좀 더 멋진 우리의 모습들을 찾아내지 못한 아쉬움을 돌아본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다들 기분 좋게 박수 치며 한 해를 보낼 수 있는 그 날을 기대한다.

김영혜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