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토에서 움트는 자본주의 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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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위크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68)은 지난 4년 동안 온갖 수단을 동원해 국내의 시장경제 활동을 억제해왔다. 예전에 정치범 수용소로 쓰이던 강제노동 수용소는 요즘 ‘경제사범’들로 넘쳐난다.

일반 주민들의 생존 자구책인 장마당과 해외 교역 증가에 그동안 북한 당국은 속수무책이었다 #capitalism, North Korea style

장마당(민간시장)은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거나 영업 시간이 하루 몇 시간으로 제한됐다. 1999년 북한 형법에 명시된 경제 범죄는 8가지에 불과했지만 2004년엔 75가지로 늘어났다.

2007년엔 ‘개인식당·모텔·상점 등의 경영으로 큰 이익을 올리는 자는 10년 이상의 중노동형에 처할 수 있다’는 새 법이 제정됐다. 게다가 요즘 북한에선 화폐개혁이라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국내에서 자본주의의 실험을 중단하려는 김 위원장의 노력이 그만큼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다는 증거다. 역사상 어느 국가보다 더 엄격하게 국경과 국민을 통제해 오던 북한이 생존을 위한 주민들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통제력을 점차 상실해 간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정치경제학자 마커스 놀랜드와 스티븐 해거드의 새 연구에 따르면 북한 주민 중 ‘상거래가 출세의 지름길’이라고 믿는 사람은 전체의 약 68%에 이른다. 정부의 자유시장 탄압이 갈수록 심해지지만 이런 추세를 막기엔 역부족이다. ‘민간 사업에 종사하기가 점점 쉬워진다’고 말하는 북한 주민의 수도 계속 늘어난다.

놀랜드와 해거드는 북한 가정의 시장 소득 의존도가 높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놀랍다고 말했다. 북한 주민 가운데 소득 전액을 민간 부문에서 올리는 경우는 10년 전 43%에서 현재 50%로 늘었다. 놀랜드에 따르면 북한 상류층이 공식 경제 이외의 분야에서 민간 사업을 운영하는 규모도 갈수록 커진다.

이 중 상당수가 중국과 교역을 한다. 2002년 이후 중국의 북한 접경 지역엔 북한과 교역하는 업체가 수백 개 생겨났다. 워싱턴 소재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의 부소장인 놀랜드는 “민간부문에서 일하는 북한 주민 수가 급격히 늘어난다”고 말했다. “여기엔 교육 수준이 높은 층과 부유층,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이 포함된다.”

김정일 위원장은 1990년대 말 국가의 생존 수단으로 시장개혁 실험을 시작했다. 당시 북한은 경제가 위축되고 주민들은 가뭄과 기근에 시달렸다. 김 위원장은 중국 정부로부터 상의하달(上意下達) 식의 공산주의 정치 체제와 자유시장 경제 개혁을 결합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중국을 세 차례 방문했다.

2001년 상하이 증권거래소를 방문했을 때는 북한 고위 장성들에게 주식 거래의 개념을 설명하기도 했다. 2002년엔 가격통제를 완화하고 이익 분배제를 도입해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 가능성을 내비쳤다. 또 민간 시장이 식량 이외의 일반 소비재 부문까지 파고드는 현상을 눈감아주었다.

국내에 제한된 자유시장 세력을 형성하고, 중국을 급격하게 변화시킨 국제시장 세력엔 조심스럽고 제한적인 개방만을 허용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정책은 부분적으로 효과를 봤다. 평양에 서양 기업인들이 갑자기 몰려들진 않았다. 또 현재 평양에는 패스트푸드점이 단 한 곳밖에 없다(이 상점에서는 북한 정권이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여기는 ‘햄버거’라는 말 대신 ‘다진 소고기와 빵’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하지만 해외 무역의 규모는 북한 정부가 세부사항까지 일일이 통제하고 관리할 만한 범주를 넘어섰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 중앙정부 주도의 계획 경제가 무너지자 중산층 다수가 생존을 위해 외국과의 상거래에 나섰다. 국영기업의 관리자들은 외국 기업과의 합작으로 얻은 이익을 국가에 납부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착복했다.

국경을 넘나들며 상거래를 하는 사람들은 해적판 DVD와 불법 라디오 등 외제품을 들여왔다. 상인들은 정부의 금지조치를 어기고 평양 거리와 지방에서 이 밀수품들을 팔려고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기도 한다. 북한 당국은 민간 시장을 공식적으로 금지했고, 북한 주민이 ‘사회주의 천국’을 통치하는 공산당의 공식 노선에 의심을 품게 할 만한 외국의 오락물을 엄격하게 검열한다.

하지만 이 ‘사회주의 천국’의 논리는 해외무역이 늘어나면서 점점 더 유지하기가 힘들어진다. 2000~2007년 북한의 공식 해외 무역은 61% 늘어 51억 달러를 기록했다. 광물자원의 수출이 주류를 이뤘다.

공기업 관리자들이 외국 합작기업에서 거둬들인 이익 등 합법적 무역으로 벌어들인 돈은 MP3 플레이어·랩톱 컴퓨터 등 비공식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의 수요를 증가시켰다. 폐쇄적인 스탈린주의 국가에서 이런 거래의 규모를 정확히 가늠하긴 어렵다. 하지만 이런 거래가 이뤄진다는 사실 자체가 북한 정부의 경제 운용이 얼마나 잘못됐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북한에서 사업하는 한 유럽인(북한 사업에 해가 될 것을 우려해 익명을 요구했다)은 북한의 동업자들이 한결같이 한국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중국에서 밀수입되는 해적판 DVD를 개당 3.75달러에 구입해서 본다.

1인당 소득이 북한보다 18배나 높은 한국은 만성적인 식량부족과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는 화폐 때문에 고통 받는 북한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깨닫는 북한 주민이 갈수록 늘어난다. 심지어 세계 경제 호황의 절정기였던 2006년과 2007년에도 북한 경제는 위축됐다.

2005년 자발적인 민영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자 북한 정권은 식량 배급제를 되살리는 등 개혁 이전의 정책으로 되돌아갔다. 최근에는 시장을 탄압하고,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가격 통제를 다시 강화하고 이익 분배를 중단했다. 2006년에는 당 지도층 일부를 숙청했는데 외국의 분석가들에 따르면 개혁주의자들에게 동조하는 세력이 숙청 대상이었다.

하지만 민간 부문에 의존하는 주민이 워낙 많다 보니(놀랜드와 해거드의 연구에 따르면 북한의 도시 주민 40%가 민간시장에서 식량을 구입한다) 북한 정부는 새로운 정책을 균형 있게 적용하지 못한다. 당국은 시장 탄압 과정에서 국내 최대의 시장 중 한 곳을 제외했다. 평양 시내에 있는 이 시장에선 수백 명의 여성이 4달러짜리 중국산 의류와 육류, 가정용품 등을 판매한다.

실내 창고 안에 수백 개의 개별 매장이 설치된 이곳에선 가격이 북한 통화인 ‘원’으로 표시되지만 미국 ‘달러’나 중국 ‘위안’으로 표시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2008년 3월 청진시 경찰 당국은 시장 몇 곳을 폐쇄해 주민들의 강한 반발을 샀다. 북한의 반체제 소식통과 연결된 한국 불교계의 북한 인권운동 단체 ‘좋은 벗들’에 따르면 주민들은 경찰을 상대로 “우리만 죽진 않겠다. 당신들도 함께 죽어야 한다”고 경고했다.

‘좋은 벗들’에 따르면 청진의 상점 주인들은 당국의 조치를 무시하고 담배와 유엔 배급 식량, 의료용품 등 금지 상품의 판매를 재개했다. 당국의 감시 속에서도 자유시장 활동이 활발하다는 사실은 2006년 숙청으로 북한 정권의 균열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전문가들은 북한 지배층이 군 출신의 강경파와 기술·과학 계통 전문가 출신의 젊은 개혁파 관료들로 양분됐다고 말한다.

통상부와 상무부, 광업부 등의 지도층을 말한다. 지난 9월 취임한 박수길 재무부장은 북한 경제를 외국 투자자들에게 좀 더 개방할 의사가 있는 인물로 평가된다. 세계은행의 관리를 지낸 브래드 뱁슨은 “북한 정부 지도층은 개혁을 원하는 쪽과 기득권을 지키려는 쪽으로 갈린다”고 말했다.

전문가 출신 관료들은 얼마 전까지도 외국과의 사업을 암묵적으로 승인했다. 지난해엔 이집트 이동통신업체 오라스컴이 계약을 통해 북한 최초의 대중적인 이동통신 업체가 됐다. 이 회사는 2009년 1~9월 6만9000명의 고객을 확보해 한 달 평균 22달러의 요금으로 음성과 문자 메시지 서비스를 제공한다.

북한 정부의 시장 탄압이 이렇게 들쭉날쭉한 이유는 김정일 위원장의 양면성 때문이다. 그는 공산주의식 통제의 약화를 두려워하면서도 시장 거래의 이익을 갈망하는 듯하다. 현재 건강이 좋지 않은 김 위원장이 사망할 경우 권력투쟁이 불가피하리라 예상된다.

김 위원장의 어린 아들들이 권력을 승계할 준비가 될 때까지 임시로 후계자 자리를 맡을 인물로 그의 매제인 장성택(63) 현 노동당 행정부장이 유력시된다. 북한의 기준으로 보면 비교적 젊은 정치인인 장성택 부장은 이미 북한의 제2인자로 간주된다. 그를 만나본 한국인 두 명은 민간 기업을 시찰하러 아시아 곳곳을 자주 방문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를 개혁주의자로도 본다.

북한의 차기 지도자를 둘러싼 추측은 여러모로 1978년 중국의 상황을 연상케 한다. 당시 중국에서는 공산당의 신세대 수뇌부가 경제 자유화를 시작했다. 중국의 경험에 비춰 볼 때 일단 시장지향 개혁이 시작되면 원점으로 되돌리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지금은 북한 개혁주의자들이 몸을 사리지만 그들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면 한창 성장 중인 민간 부문으로부터 확고한 지지를 받게 될 듯하다.

JERRY GUO 기자 / 번역·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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