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품을 말한다] '글래디에이터' 영화 감독 리들리 스콧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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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올 여름 영화시장 역시 할리우드영화가 주도할 전망이다. 스펙터클 영화 '글래디에이터' 도 그중 하나. 리들리 스콧 감독이 이 작품을 연출하면서 품었던 여러 단상들을 중앙일보에 e - 메일로 보내왔다.

고전적인 소재를 완전히 새롭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연출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래서 가급적 로마를 배경으로 한 예전의 영화들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오히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 에 나타나는 사실주의적 기법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관객들이 마치 귓가로 총알이 스치는 전장의 한 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 스필버그의 연출력을 높이 평가한다.

영웅을 둘러싼 신화적인 요소에 심리와 정치색을 불어 넣기로 했다. 교활하고 악마적인 황제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데 따른 소아적인 면모도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콜로세움의 화려한 검투 장면은 디지털 사운드로 처리해 리얼리티를 살렸다. 아울러 목숨을 건 검투사의 처절한 몸부림을 보면서 열광하는 군중들의 악마성도 놓치지 않았다.

로마의 풍경이 다른 영화들과는 좀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실제로 로마인들은 6층짜리 '고층' 아파트에 살았으며 당시 로마에는 높은 건물도 많았다. 지금까지 로마는 편평한 도시로 묘사됐지만 이 작품에서 나는 로마를 웅장하고 수직적인 도시로 되돌려놓고 싶었다.

주연을 맡은 러셀 크로의 치열한 연기가 없었다면 감동은 반감했을 것이다. 명석하고 지적인 크로가 직접 자료를 뒤지며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 '와! 정말 동물적인 감각의 연기자군!' 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1년여 작업을 하면서 영화에서는 스토리와 배우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관객들은 극중 배우들의 움직임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여행을 할 수 있어야 그 영화를 자기 것으로 완벽히 소화할 수 있다. 그래야만 배우와 의사소통이 가능해진다.

영화의 상품성은 바로 이 의사소통에 달렸다. 영화 매니어들은 예술성을 높이 따진다. 하지만 나는 소수를 생각하지 않는다. 엄청난 예산이 들어가는 작업이기 때문에 다수의 관객을 염두에 두고 있다. 영화의 상업성을 부정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극중 검투사를 훈련하는 프록시모에서 감독인 나의 모습을 읽으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내게 그런 면모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프록시모는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 검투사에게 자신을 '엔터테이너' 라고 소개한다.

나는 영화 속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스릴을 느낄 뿐 아니라 검투사들에게 잔인한 숙명을 씌우면서도 아무런 갈등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즐거움을 느꼈으니까. 연출은 하나의 세상을 창조해 내는 작업이다.

과거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것이든, 미래를 배경으로 한 것이든 마찬가지다. 정말 매력적인 일이다. '글래디에이터' 는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영화에 나타나는 로마의 풍경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간혹 영화감독보다 더 고독한 직업을 가졌으면 하는 생각에 빠질 때도 있다. 진짜 완벽한 삶은 작가나 화가, 음악가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작업은 자신과 완전히 합일을 이루는 과정이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붓과 캔버스, 노트 만으로 작업을 하는게 가능하다. 그런데 영화를 찍는 작업에는 엄청난 수의 사람이 동원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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