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풍류탑골 (3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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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39. 움직이는 얘기보따리

늘 어디서나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분들이 있다. 그 중심은 어지간해서 이동하지 않고 모임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는데 소설가 천승세 선생도 그런 분이다.

선생이 한마디 하면 어떤 시구보다 빛이 났다. 날카로운 끌처럼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용렬함과 비겁함을 쪼아냈다. 특히 천선생의 경우엔 사람을 넘어 하찮은 동물에까지 두루 안 미치는 바가 없었으니….

말 안듣고 짖기만 했던 개의 코를 물어 개의 버릇을 고쳐준 이야기며 젊은 시절 가난한 연인이 곡물 부대로 지어 입은 속옷에 쓰인 '정량 20㎏' 등은 문인들에겐 고전이 됐다. 왕년의 주먹시절 이야기는 전설이 된지 오래다.

어떻게 하여 많은 이야기들이 뒤따르는 것인지 참으로 신기하다.

한마디로 '걸어 다니는 전설' 이며 '움직이는 설화' 라고나 할까. 천선생이 겪은 이야기 끈을 풀어놓으면 그대로 생생한 그림이었다.

"내가 동네에 나갔다가 문열이 돼지 새끼 한 마리 안 얻어왔냐. 너 문열이 알아□ 돼지가 새끼 날 때 맨 처음 지 에미 그 곳을 열고 나오는 놈 말야. 고것이 다른 놈허고는 다르잖냐. 안커요. 그래서 그 놈을 일부러 매장해버리기도 하고 그냥 밟아 죽이기도 하지.

그런데 고놈이 너무 불쌍해서 내가 집으로 데리고 왔지. 하, 고놈 생각하면 이뻐 죽겠어. 그래서 고놈하고 집에 있던 개를 내가 우유를 주고 키웠지. 니들 돼지란 놈을 멍청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는데 그래도 고것이 영리한 디가 있어요.

한 5분 정신없이 먹고서는 한 10초 정도 명상하는 것 모르지. 명상할 때 돼지 표정을 보면 참으로 거룩해요. 그렇게 한 4개월 정도 키웠더니 중돼지가 다 됐어. 아참 그놈 이름이 깡돌이여. 왜 내가 그 멍청한 돼지한테 깡돌이란 이름 붙여준지 알어?"

그쯤 말하면 듣는 사람들은 침을 꼴깍 삼키고 술도 한잔씩 권하면서도 한시 빨리 다음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학수고대한다. 약간 뜸을 들인 후 이야기를 계속한다.

"키운지 3개월이나 되었을까? 한번은 밤중에 같이 키우던 개 흰돌이가 죽어라고 소리를 질러요. 흰돌이란 놈도 영리하고 사나운 놈인디. 무슨 난리가 벌어졌나하고 내가 나가봤지. 아 그랬더니 그 돼지란 놈이 흰돌이 국부를 우유 젖꼭진줄 알고 빨고 있었던 게야. 허 참, 그러니 그 흰돌이란 놈 땀을 뻘뻘 흘리며 소리를 지를 수밖에. 내가 그냥 버려두면 흰돌이가 죽을 것 같아서 돼지란 놈을 혼내서 중단시켰지. "

듣던 사람들은 모두 눈물.콧물을 쏟으며 웃지만 천선생은 웃지도 않고 계속했다.

"그래서 고놈을 내가 깡돌이라고 불렀던거야. 그래서 이젠 '개하고 같이 키워서는 안되겠다' 싶어 돼지우리를 만들어 키웠지. 그런데 고놈이 뭘 아는지 내가 가기만 하면 지 에민줄 아는지 고렇게 반가워할 수가 없어요. 한 4개월쯤 됐을 때였는데 사고가 났어.

밥을 주려고 우리에 들어가서 고놈을 돌아 들어가는데 나를 머리로 받는거야. 그런데 어떻게 재수가 없을라고 내가 넘어졌잖냐. 지가 싼 똥이나 오줌 속에 자빠졌는데…, 어찌나 화가 나던지. 나도 참았어야 했는데 못 참고 허벅지를 한 대 때렸지.

그랬더니 이 자식이 그냥 옆으로 가더니 픽 쓰러져요. 냄새 더럽더라고. 그런데 고놈이 점심 때에 가봐도 일어나지를 못해. 그래서 보니 허벅지 부근이 좀 부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 계속 자빠져 있는 거야. 결국 며칠 후에 죽더라고. 뒤에 확인해보니 허벅지 부근의 뼈가 으스러진거래. 병들어 죽은 놈은 못먹잖냐. 불쌍하기도 해서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줬지. "

한복희 <전 탑골주점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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