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파랑새는 날아갔지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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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9면

<본선 16강전>
○ 천야오예 9단 ● 최철한 9단

제8보(84~98)=화나고 억울한 일이 많아도 참는다. 인생은 한 번뿐인데 순간적인 분노로 망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바둑은 다르다. 수없이 둘 수 있다. 맘껏 분노를 폭발시키고 거칠게 승부수를 던질 수도 있다. 한데 프로 바둑은 또 다르다. 승부가 곧 인생이다. 중요한 고비에서 한 번의 승패가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다. 그래서 프로들은 고민한다. 참고 길게 가느냐, 짧고 굵게 승부를 보느냐.

최철한 9단은 지금 무척 화가 나 있다. 하변을 공격했는데 상대는 태연히 손 빼고 실리를 챙겼다(백△). 그런데도 흑은 맹공을 펼치지 못하고 꼬리를 내려야만 했다(흑▲). 이 모습을 보며 천야오예 9단은 84, 86의 수순을 거쳐 92까지 유유히 하변을 안정시키고 있다. 파랑새는 날아가고 남은 것은 빈손뿐이다. 최철한은 생각한다. 이제라도 참고 길게 가야 할까. 참는 길은 ‘참고도’ 흑1로 실리를 챙겨두는 것이다. 흑5의 후수가 가슴 아프지만 냉정하게 반상 최대의 곳을 차지하며 가는 데까지 가보는 것이다. 바둑은 100m 달리기가 아니고 마라톤이니까 상대가 앞으로 어떤 실수를 범할지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닌가.

하지만 최철한은 93으로 끝까지 ‘차단’을 고집했다. 96을 당하니 이젠 집으로는 상대가 안 된다. 하지만 일발필도의 한 번 승부에 모든 것을 걸기로 한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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