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한 푼이라도 더 … 사무관의 눈물, 과장의 ‘전화 스토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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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해마다 이맘때면 국회 의원회관은 한 푼이라도 더 예산을 타내기 위해 로비를 펼치는 민원인들로 북적댄다. 중앙부처 국장, 군수, 시민단체 간부, 대기업 이사, 과학자, 예술인 등 의원실을 들락거리는 인사들의 직업도 다양하다. 의원들도 사람인 이상 이들의 애타는 지원 호소에 생각이 달라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번 예산에서 ‘대학로 복합문화공간 조성 기금담보 대출금’의 원리금 전액을 상환하겠다며 200억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지난달 30일 문방위 예산심사소위 때 일부 야당 의원이 “사업계획이 미비하다”며 예산 지원에 제동을 걸었다. 그러자 문화부 예술정책과의 막내 정모(여) 사무관이 자발적으로 나서 “리모델링을 통해 공간 활성화가 되면 자립형 공간으로 운영을 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한 의원은 “불쑥불쑥 나와서 얘기하지 말라”고 꾸짖었다. 마음이 상한 정 사무관은 회의석 뒤에 앉아 계속 눈물을 흘렸다. 그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진 의원들은 재논의 끝에 결국 200억원 전액 지원을 결정했다.

소방방재청의 강모 과장은 예결위 보좌관들에겐 전화 스토커로 통한다. 기획재정부가 추경 때 편성했던 ‘물놀이 안전관리요원 운영 예산’ 14억원을 내년도 예산에서 전액 삭감하자 이를 복구시키려고 예결위 의원실에 파상적인 전화공세를 벌였다. 한 의원실 관계자는 “부재중 전화 7~8통은 기본이고 결국 통화가 안 되니까 새벽에까지 전화를 하더라”며 혀를 내둘렀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최선주 박사는 최근 두 달여 만에 체중이 7㎏이나 빠졌다. 삭감된 방사선기술개발사업비 30억원을 되살리기 위해 10월부터 연구원이 위치한 대전에서 여의도까지 거의 매일 KTX로 왕복을 하며 로비를 벌인 때문이다. 최 박사는 예결위·교과위·복지위 소속 의원실 50~60곳을 돌아다니며 “이 예산이 깎이면 암환자 진단 검사에 심각한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며 읍소를 했다. 최 박사의 노력 덕분에 교과위는 이 30억원을 살려 예결위로 넘겼다.

호남지역 예산 민원을 하러 국회에 오는 인사들은 반드시 한나라당 이정현 의원실을 방문한다. 전남 곡성 출신의 이 의원은 비례대표지만 여당 내 ‘호남 예산 지킴이’로 통한다. 이 의원은 올해도 호남고속철, 여수 산업단지도로 예산을 확보하는 데 공로를 세웠다. 요즘 오전 10시부터 예결위가 시작되기 전에 이 의원을 잠깐이라도 만나고 가겠다는 호남 쪽 민원인들로 이 의원 사무실은 아침부터 문전성시다.

기업들의 로비전도 만만찮다. 최근 설탕의 수입 관세율을 낮추는 ‘관세법 개정안’(관세율 40%→10%)을 놓고 제과업체들과 제당업체가 정면 충돌했다. 제과업체 측은 “제당업체 독과점 때문에 설탕값이 너무 높다”며 관세 인하를 환영했지만, 제당업체 측은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해 높은 수입 관세는 불가피하다”고 맞섰다. 기재위의 한 보좌관은 “잊을 만하면 양측이 한 번씩 찾아와 곤욕을 치르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기재위 조세소위는 설탕 관세율을 5%포인트 정도만 낮추는 것으로 결정해 제당업체의 파워가 더 셌다는 말도 나온다.

김정하·임장혁·선승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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