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시론

북핵, ‘스몰 바긴’도 고려할 때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7면

방북 직전 한국 정부는 그에게 북·미 간 평화협정을 수용할 수 없다는 강고한 원칙을 주문했다. 평양에서 마주한 외무성의 강석주 제1부상은 북핵 개발을 미국 때문이라고 책임을 돌렸다. 낡은 레코드판 돌리듯 평화협정 체결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평화협정 체결을 출발역으로 보는 북한과 종착역으로 삼겠다는 남한 사이에서 보즈워스는 묘수를 찾기 힘들었을 게 분명하다.

북한제 무기를 실은 수송기가 태국 공항에 억류된 사건은 앞으로 보즈워스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 수 있다. 유엔의 대북제재 결의 1874호에 정면 배치되는 북한의 행위가 자신의 방북 직후 불거진 것이다. 상세한 조사 결과가 나와야겠지만 북한은 어떤 식으로든 반발할 것이 뻔하다. 이렇게 되면 북한을 6자회담에 불러내려던 보즈워스의 구상은 헝클어질 수 있다. 북·미 관계가 다시 꼬이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일각에서는 제기된다. 북·미 관계는 신뢰구축을 위해 앞으로도 험한 길을 가야 한다. 양측이 당장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를 협상 테이블에 올리기 어려운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MB 정부로서는 다소 여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사정이 그리 녹록지는 않다. 북·미 관계 변화에 적극 대처하고 한반도 정세를 주도적으로 관리할 책임이 MB 정부에 있기 때문이다. 태국에 억류된 북한제 무기 문제로 한동안 북·미 간에는 냉랭한 기운이 감돌 수 있다. 그렇지만 크게 보면 보즈워스 방북을 계기로 북·미 대화의 물꼬가 트이고 북한은 오바마 행정부와의 접근을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

한·미 정부는 북핵 해결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 있다. 그러나 장단기 전술 운용 방식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북핵 문제는 한국의 현안이지만 세계정책을 펴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미국의 문제이기도 하다. 양자 간 협상을 통해 북한을 6자회담으로 끌어내는 것이 오바마 행정부가 주력하는 단기적 목표라면 MB 정부는 6자회담 자체보다는 북핵 문제 해결이라는 보다 근본적 목표를 추구한다. 사실 한국의 북핵 그랜드 바긴(grand bargain)과 미국의 포괄적 패키지(comprehensive package)는 내용 면에서 큰 차이점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러면서도 양측 모두 각자의 용어에 집착하는 것은 미묘한 인식차가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런 상황을 감안해 북핵 한·미 공조와 대북 접근법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북핵 ‘그랜드 바긴’은 일거에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요술방망이가 될 수 없다. 북핵 현안을 ‘빅딜’ 한다 해도 항목별로 타결해 들어가는 단계에 접어들면 궁극적으로 ‘행동 대 행동’ 방식이 될 공산이 크다. 그랜드 바긴 방식에만 얽매이다 보면 MB 임기 내에 시간만 허비하고 구체적 해결책이 나오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랜드 바긴과 함께 단순하고(simple), 부드럽고(soft), 작은(small) 바긴도 준비해야 한다고 권하고 싶다. 유엔제재의 동참과 대화 병행이라는 두 가지 경로(two track) 뿐만 아니라 그랜드 바긴과 스몰 바긴의 배합도 병행해야 한다.

이조원 중앙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