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병욱칼럼] 입법자의 법치·준법의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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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주일 후면 16대 국회의 임기가 시작된다. 그동안 진척이 없던 16대 국회 원(院)구성 논의는 3당 원내총무가 법정기일을 지키기로 합의함에 따라 실로 오랜만에 정상적인 원 구성 가능성이 보인다. 물론 여야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아직도 불투명한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당은 양당체제에서 다수당이 된 버거운 야당을 포위하자면 군소정당 및 무소속과 손잡을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특히 성공적 남북정상회담이 국내정치에 강한 영향을 줄 수 있으리란 기대에서 모든정치일정을 그 후로 미루고 싶어 했다. 야당도 이달 말의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지도부가 모두 총재.부총재 경선에 정신이 팔려 있다.

국회법 제5조3항에는 국회의원 총선거 후 최초의 임시회는 의원의 임기 개시 후 7일에 집회한다고 명시돼 있다. 16대 국회의원의 임기 개시일이 5월 30일이니 16대 국회 개원임시국회 집회일은 6월 5일이다.

국회의장과 부의장 선거는 국회법 제15조2항에 '총선 후 최초집회일' 에 실시한다고 못박혀 있다. 16대 국회가 6월 5일에 열려 그날 국회의장.부의장을 뽑아 원 구성을 하지 못하면 국회법 위반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원 구성이 늦어지는 게 다반사였다. 선거부정을 이유로 야당이 등원을 거부하거나 원 구성에 협조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고, 의장단.상임위원장.상임위원 정수배정 협상이 난항을 겪은 경우도 있었다.

각당의 정략에 의해 원구성 자체가 늦춰지는 고질을 막기 위해 지난 94년 임기 개시 후 7일에 집회해 그날 의장.부의장을 선출한다는 명문규정을 도입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이 규정이 최초로 적용된 96년 15대 국회 개원 때도 당시 야당의 극한 저지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때 야당쪽에선 이 법 규정이 강제규정이 아닌 훈시규정이란 구실을 댔다. 강제규정과 훈시규정을 가르는 분명한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지키지 않을 경우 직접적으로 처벌 또는 효력 및 권리 상실 규정이 없다고 해서 법규정을 안 지켜도 된다고 하면 법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만다.

대통령과 총리.장관.법관 등은 직무집행에서 헌법이나 법률에 위배한 때에는 국회가 탄핵을 소추(訴追)할 수 있다. 다른 국가기관의 법률위배는 탄핵 소추를 하면서 입법기관인 국회 스스로는 법의 명문규정을 버젓이 위배한다면 국가기강이 설 수 없다. 입법자가 법을 무시하는데 법치(法治)와 준법(遵法)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현 단계에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가장 큰 취약점은 법치주의와 준법정신의 결여다. 우리가 민주화의 길에 들어섰다고는 하나 법치와 준법이 뿌리내리지 않고선 성숙한 민주주의를 결코 향유할 수 없다.

법치와 준법의 체질화를 위해선 악법(惡法)은 빨리 고쳐야겠지만 고쳐지기 전까지는 그것도 지켜야 한다. 더구나 임기 개시 7일에 국회 원구성에 들어가야 한다는 국회법 규정은 악법도 아니다. 16대 국회가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를 다짐한다면 시작부터 반듯해야 한다. 법이 정한 날짜에 국회를 열어 국회의장단을 선출, 원 구성을 하는 것이다.

국회의장단 배정을 놓고 사전에 무리하게 협상을 하려 하지 말고 국회에서 각당이 후보를 내 경선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보기에도 좋다.

각 정당의 후보 선정은 각 당의 형편에 따라 지도부가 지명하거나 의원총회에서 선출할 수 있겠지만 이왕이면 의원총회에서 뽑는 것이 보다 민주적이다.

여야간 원만한 협력을 위해 국회의장을 차지한 정당은 부의장을 타당에 양보한다는 양해 정도는 필요할 것이다. 여당이 과반수를 차지했던 시절에는 제1당이 국회의장 외에 부의장 두 석 중 한 석을 차지했지만 과반수 의석 정당이 없는 현상황에선 그건 욕심이다.

상임위원장 배정은 정당의 의석비율로 하고, 이른바 '중요 위원회' 도 독식하려 하지 말고 의석비율로 나누면 될 일이다. 여야가 협상을 통해 합의할 수 있는 것은 하고, 안 되는 것은 표결로 결정한다는 의회주의 원칙에만 충실하면 오래 시간 끌 일이 무엇이겠는가.

여야가 법을 지키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법정일인 6월 5일을 도과(徒過)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16대 국회는 모처럼 처음부터 법을 지켜 법치와 준법의 새로운 전범(典範)이 세워지기를 기대한다.

성병욱 <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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