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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디자인의 적, ‘서두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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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 덕분에 질경이들이 잔디처럼 깔리고 이리저리 타고 오른 등나무 줄기가 그늘을 만들며 야생화들이 꽃밭을 이뤘다. 그 터에 그는 집을 지었다. 그리고 남들이 버린 기와를 얻어다 높지 않으나 의연하고 품격 있게 담을 쌓았다. 애써 멋 부리지 않았기에 맛이 있고 자꾸 손대지 않았기에 멋이 배인 곳. 그 죽설헌이 던지는 화두는 “더디고 느리게 내버려두라”는 것!

# 진득하니 내버려두지 못하고 자꾸 서둘러 손대 덧난 것 중 하나가 서울 광화문 광장이다. 그런데 거기에 높이 34m에 달하는 스노보드 도약대가 순식간에 세워졌다. 국제스키연맹(FIS)이 주관하는 2009-2010시즌 스노보드 월드컵에 어제부터 사흘 동안 사용한 후 철거할 예정이라고 한다. 서울시는 “도시마케팅을 위한 수단이며, 평창의 겨울올림픽 개최를 지원할 필요가 있어 시작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왠지 이유가 궁색하다.

# 서울은 알프스에 있는 인스부르크가 아니다. 서울에 오면 늘 스노보드 활강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설령 스노보드 활강처럼 짜릿하고 흥분된 서울을 알리고 그 뒤로 펼쳐지는 경복궁의 모습 등을 담아 서울의 이미지를 보다 활기차고 신나게 연출하려 의도한 것일지라도 정작 스노보드 도약대가 광화문 광장에 세워진 모습을 보면 그냥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다.

# 여전히 공사 중인 광화문 처마 끝자락에서 활강을 시작해 세종대왕 동상의 뒤통수를 칠 것만 같은 스노보드 도약대를 보면서 아연실색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서울의 도시마케팅이 되고 삼수하는 평창 겨울올림픽이 유치라도 된단 말인지. 무르팍 위에서 노는 것은 재롱이라 볼 수 있지만 이건 머리 끝까지 올라가 상투를 틀어쥔 꼴이다. 백보양보해서 그래도 굳이 꼭 해야만 했다면 시청앞 광장도 있지 않은가. 조선의 정궁으로 통하는 대문 앞 육조거리 한복판에서 꼭 널을 뛰어야만 서울이 사는가? 나라의 격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 비단 스노보드 활강대만이 문제가 아니다. 기형화된 광화문 광장 자체도 문제다. 오죽하면 광화문 광장을 가리켜 ‘세계에서 가장 큰 중앙분리대’라는 비아냥 섞인 이야기가 나왔겠는가. 물론 광장이 섬처럼 돼버린 데는 오세훈 시장의 디자인 욕심보다도 이명박 정부의 촛불 콤플렉스가 한 몫 단단히 거든 느낌이다. 광장은 광장인데 사람들이 모여 시위나 집회를 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는 정치적 강박관념이 은연중에 작용해 광장을 차도 속에 갇힌 섬으로 만들어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 내년에 서울은 세계디자인수도가 된다. 물론 서울이 세계 최고의 디자인 도시라는 의미가 아니라 디자인적으로 변화할 필요와 가능성이 큰 도시라는 뜻이 담긴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광화문 광장은 원점에서 다시 검토해야 한다. 마음 같아선 모두 걷어내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피 흘리고 땀 흘린 이들의 이름 석자가 담긴 동판으로 광장 전체를 덮어버리고 싶다. 당분간 누구든 허튼 짓 못하게 말이다.

# 디자인의 진짜 적은 ‘서두름’이다. 125년이 넘도록 느리고 더디게 짓고 있는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먹여 살리지 않나. 광화문 광장도 ‘느리고 더디게’ 하며 때로 내버려둬야 한다. 그래야 되살아난다. 나주의 죽설헌처럼!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