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사막 남극을 가다] ④ 중국 장성기지 가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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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기지가 들어선 남극 킹 조지 섬에 있는 세계 각국의 기지들은 모두 이웃 사촌이다. 때문에 새로운 월동대장이 오면 가까운 기지에 인사를 다니는 것이 관례다. 이사를 한 뒤 이웃에게 인사하는 것과 비슷하다.

필자를 포함해 12월 말부터 세종기지를 책임질 강성호 대장과 일행은 현재 기지를 책임지고 있는 진영근 대장의 안내를 받아 가장 먼저 중국 장성기지에 인사를 갔다. 장성기지는 육로로는 갈 수가 없다. 얼음과 얼음 사이의 틈인 ‘크레바스’ 때문이다. 남극 빙하는 평균 두께가 2Km가 넘을 정도로 두껍다. 그만큼 크레바스의 깊이도 깊다. 크레바스에 빠지면 생명을 잃는 경우가 많다.

세종기지 대원들은 다른 기지로 이동할 때 시간절약과 안전을 위해 조디악을 타고 바다를 가로질러 간다. 우리가 떠나는 날은 날씨가 좋았지만 30분 가량 보트를 타야 했다. 고무보트를 타기 앞서 일행은 상의와 하의가 하나로 된 구명복을 입었다. 방풍, 방수, 보온 처리가 된 구명복은 대원들이 보트로 이동할 때 체온을 유지해주고 바닷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아준다. 바다에 빠졌을 때도 살아있는 시간을 연장해준단다. 두텁고 뻣뻣한 소재로 만들어진 구명복은 입기 불편했다.

일행은 중국기지로 가기 전 잠깐 동안 세종 기지 주변에 있는 빙하를 관찰했다. 바다와 맞닿은 빙하는 세종기지가 처음 세워졌을 때보다 수 백 미터나 뒤로 후퇴했단다. 그만큼 빙하가 줄어든 것이다. 강성호 대장은 지구 온난화 때문에 빙하가 녹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래도 푸른빛을 내는 빙하는 장관이었다. 보트는 빙하 가까이에 접근하지 못했다. 빙하가 깨지면서 바다에 떨어지면 그 영향으로 큰 파도가 만들어지고 배가 전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빙하를 구경하다 일행 가운데 몇 명이 사진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바다표범 두 마리가 일광욕을 하듯이 작은 유빙 위에 푹 퍼져 누워 있는 모습을 발견한 것. 보트를 운전하는 대원은 보트의 속도를 줄이고 조용히 바다표범이 침대로 사용중인 유빙에 접근했다. 바다표범은 보트가 접근해도 그대로 누워 있었다. 유난히도 긴 허리가 특색인 바다표범은 고개를 조금만 들어 ‘너희들 또 왔냐’라는 표정으로 일행을 바라봤다. 곧 귀찮다는 듯 다시 누워 ‘푸우’ 하는 숨소리만 냈다.

바다표범은 오래 전 기름과 고기를 얻기 위해 자신들을 사냥하던 사람들에 대한 나쁜 기억을 잊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현재 남극에서는 연구 목적을 제외하고는 바다표범을 사냥할 수 없어 사람을 겁낼 필요가 없다. 에스키모들이 생존을 위해 물개나 바다표범을 사냥할 수 있는 북극과는 전혀 다르다. 남극에 사는 바다표범에게 사람은 별 위험한 존재가 아니다.

중국 장성기지의 첫 인상은 ‘공사중’이었다. 여기저기 새로 지은 것처럼 울긋불긋한 건물이 보였다.

연료를 저장하는 커다란 유류저장고는 세종기지보다 2배 정도는 많아 보였다. 중국은 최근 3년 동안 무려 5채의 건물을 이미 지었거나 짓고 있다. 원유를 비롯해 금속 등 다양한 지하자원과 생물자원 개발 가능성을 보고 남극연구를 위한 시설을 대거 확장하고 있는 것.

중국은 ‘설룡호’라는 1만8000톤급 쇄빙선을 이용해 건설 원자재를 모두 중국 본토에서 들여오고 있단다. 한국 극지연구소가 최근 운행을 시작한 ‘아라온’호가 6000톤급이니까 무려 3배나 된다. 그런데도 중국은 새로운 쇄빙선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2명의 월동대장들은 극지연구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중국이 부러운 눈치였다..

일행은 중국 기지 대장과 인사를 나눈 뒤 중국 대원의 안내로 기지 이곳 저곳을 구경했다. 한 건물은 내부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연구용이란다. 최첨단 연구장비로 내부를 꾸밀 계획이라고 했다. 세종기지의 연구장비도 좋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중국 기지가 최첨단 장비를 갖춘다니 왠지 모를 샘이 났다.

일행은 중국 기지에서 부족한 보트용 기름을 한 드럼 빌렸다. 빌린 기름은 나중에 보급받아 갚기로 했다. 남극에서는 기지간에 필요한 물품을 서로 빌리고, 빌려주는 일이 흔하다. 물론 차용증서를 쓰는 것은 아니다. 그냥 구두로 빌려달라고 하면 여유가 있는 한 선뜻 빌려준다. 워낙 척박한 환경이라 필요한 물품이 없으면 바로 생존을 위협받는 점을 서로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인심이 후한 시골 같다.

박지환 자유기고가 jihwan_p@yahoo.co.kr

*박지환씨는 헤럴드경제, 이데일리 등에서 기자를 했다. 인터넷 과학신문 사이언스타임즈에 ‘박지환 기자의 과학 뉴스 따라잡기’를 연재했다. 지난 2007년에는 북극을 다녀와 '북극곰도 모르는 북극 이야기'를 출간했다. 조인스닷컴은 내년 2월 초까지 박씨의 남극 일기를 연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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