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세상보기] 재스민이 드디어 피었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지난 4월의 이 난에서 이야기했던 재스민, 지난 겨우내 죽음과 싸우던 재스민이 오늘 아침 드디어 피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재스민의 안위(安危)가 궁금해서 현관으로 달려가 들여다보게 하던 재스민.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열쇠를 돌리기 무섭게 그 화분으로 달려가 연초록으로 매달린 꽃망울부터 바라보게 하던 재스민. 언제부터인가 그 연초록 꽃망울이 보랏빛으로 변한 것이 하나 보이던 재스민. 어제 저녁 학교에서 돌아와 맨 처음 그 꽃을 들여다보았으나 보랏빛 꽃망울이 그냥 보랏빛으로 있던 재스민. 벌써 며칠 째 보랏빛으로 있던 재스민.

그래서 그러다가 그대로 시들어 떨어지면 어떡하나 걱정한 끝에 '이제 향기가 나기 시작하는구나' 라고 거짓말로 중얼거리며 나를 위안했었는데 그것이 오늘 아침 드디어 핀 것이다.

보라색 꽃망울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화알짝 열려 있다. 며칠 전부터 꽃망울이 보라색으로 변해 있던 그것만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사방에 보라색 꽃송이가 조심스럽게 일어서 있다. 나는 꽃송이마다 박수를 쳐준다.

그리고 중얼거려준다. '참 수고했구나, 꽃을 피우느라고. ' 다롬이 왜 그러는가 하고, 내 옆으로 공을 물고 와 빙빙 돈다. 나는 다롬에게 이야기해 준다. '재스민이 드디어 피었구나' 라고. 그 녀석도 펄쩍펄쩍 뛴다.

커피를 마시다가도 재스민이 드디어 피었다네 하고 중얼거린다. 아니다. 소리 높여 외쳐준다.

공기들도 전부 그 소리에 화답하는 것 같다. 마치 재스민을 축하라도 하듯이 음악을 크게 튼다.

바이올린이 커튼을 젖히고 뛰어나가는 것 같다. 창밖을 바라본다. 어젯밤에 비가 왔는지 길들의 몸이 촉촉히 젖은 채 함초롬한 모습이 되어 누워 있다.

나는 길에게도 중얼거려준다. '재스민이 드디어 피었네… 재스민이… . '

"셋이 가다가 한 사람이 길을 잃는다 해도 목적지에는 이를 수 있다. 길 잃은 자가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셋 중) 두 사람이 길을 잃는다면 수고만 하고 목적지에는 이르지 못한다. 길을 잃은 자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온 천하 사람이 길을 잃고 있다. 자기에게 바라는 바가 있어도 도저히 얻을 수가 없다. 슬픈 일이 아닌가! 훌륭한 음악은 속인의 귀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절양(折楊)이니 황화니 하는 속곡(俗曲)은 환성을 지르며 반긴다. 그러므로 고상한 말은 대중의 마음에 들어가지 않는다. 참된 진리의 말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비속한 말이 성하기 때문이다.

두 갈래 길에서 망설임이 많아지면 목적지에 갈 수 없다. 그런데 지금은 온 천하가 길을 잃고 있다. 자기에게 바라는 바가 있다 해도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

'장자, 천지' 중에서, 장자의 중얼거림이다. 그렇다. 길을 잃는 것은 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들춰본 장자 속에 들어앉아 있는 말. 참 멋지다.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그런 꼴이 아닌가, 아니면 내가? 내가 사는 모습도 그런 꼴이다.

그렇다. 셋 중에 한 사람이 길을 잃으면 괜찮다. 그 한 사람만 잘못된 길로 가서 후회하고 있으면 되니까. 그러나 우리들은 지금 너무 많은 길잃음 앞에 서 있다. 알 수 없다.

누가 진실로 길을 잃었는지. 이제 기다릴 것은 재스민이 향기를 뿜는 것이다. 이제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현관문을 열 때마다, 향기를 찾아 달려가리라. 저기 향기를 기다리며 달려가는 길이 있는 한 세상은 아름다우리라. 천하가 길을 잃고 있네 하고 외치지 않아도 되리라.

강은교 <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