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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풍류탑골 (19)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19. 탑골의 가수들

분위기란 묘한 것이다. 그렇게 소란스런 시인들이 와도 아주 점잖게 술자리가 무르익어가는 때가 있었다.

박선욱 시인이 끼어 있는 일행 가운데 누군가 점잖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거나 소설가 천승세 선생이 술을 마시다가 노래를 청할 때였다.

"야 박선욱, 영락교회 성가대원! 벨칸토 창법으로 노래 한자리 혀라. "

"아이쿠 선생님, 아직 분위기도 무르익지 않았는데 무슨 노래를. "

"어허, 노래를 허라니까. 니가 노래를 불러야 쓰겄다."

감히 누구의 말이라고 거역하겠는가.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은 적이 있어 다리가 약간 불편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박선욱 시인은 일어나 노래를 불렀다. 박시인이 주로 불렀던 것은 '그리운 금강산' '떠나가는 배' '광야에서' '솔아 푸르른 솔아' 등이었는데 웬만한 성악가보다 더 잘 부르는 것 같았다.

가끔 문인들의 노래를 듣다보면 나는 그들이 글을 쓰지 않고 노래판으로 갔어도 성공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들이 전국 노래자랑 같은 프로에 나가 노래를 부른다면 훨씬 빨리 유명해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수준급 실력에 약간의 익살만 더한다면 인기상은 떼어논 당상이다.

"누구의 주제런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 만이천봉 말은 없어도 수수만년 아름다운 산 못가본지 몇 몇 해‥. "

침침한 편인 가게의 조명을 깔고 영롱하게 불러대는 그 노래는 많은 사람들을 조용히 눈감게 하였고 오늘에야 찾을 수 있나에 이르면 누구나 눈을 뜨고 노래 부르는 이가 정녕 박선욱 시인인가 하고 의심하였다.

노래가 끝나면 재청이 이어졌고 그 자리에 이재무 시인이 있을 경우엔 '칠갑산'으로 이어져 분위기를 돋웠다.

천승세 선생의 경우 같은 목소리로 가곡을 부르곤 했다. 그때쯤이면 박철 시인이 피아노 앞으로 가서 건반을 두드리다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고달픈 길 나그네길 비바람이 분다 눈보라가 친다' 어쩌고 하는 '이별의 종착역'이란 노래를 라이브 가수처럼 불러댔다.

이시영 시인이 함께 했을 때는 굵은 목소리로 '립스틱 짙게 바르고'가 보태졌고 고형렬 시인의 '파도', 이도윤 시인의 '안개 낀 장충단 공원', 이은봉 시인의 '돌아가는 삼각지'등등으로 끝없이 이어져 그쯤이면 완벽한 노래 경연장으로 탑골은 변해 있었다.

어쨌든 이들 젊은 시인들은 각기 지닌 서러움과 시대의 아픔을 술과 노래로 울었다.

그리고 그 술과 노래는 대중들과 함게 하는 시낭송회, 혹은 홀로 밤 새우는 원고와의 씨름을 통해 시로 아름답게 승화하고 있었다.

이재무나 이승철.박영근 등의 젊은 시인들 외에도 김주대.이원규.박남준.오철수.나희덕.차정미.이규배.김남일.현준만.이재현씨 등등의 젊은 문인들이 그렇게 탑골에서 서러움을 달래며 그야말로 젊은 한국문단의 한 축을 너끈하게 이루질 않았나 싶다.

아프게 운 그 시절을 거쳐 이제는 그들이 어엿한 중견시인들이나 작가의 자리에 우뚝 서 있음을 신문이나 TV를 통해 확인하는 것은 요즘 나의 재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들의 약간 선배이면서 생각만 해도 슬며시 웃음을 짓게 만드는 시인이 있다. 김사인씨다. 언젠가 황석영 선생이 그를 일러 '세수 안 한 사슴'이라 불러 절묘하다고 생각했는데 늘 조용하게 술을 마셨다.

그런데도 김사인 시인은 늘 선배 작가 송기원 선생의 지청구를 들어야했다. 요점은 한 자리에 앉은 여성 문인들의 마음을 송선생이 사로잡았다 생각할 때쯤이면 김시인이 순식간에 가로챈다는 것. 그말을 들을 때마다 김시인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본인은 그럴 의도도, 그런 일도, 그럴 생각도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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