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은행이 원금을 까먹다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정기예금보다 금리를 더 준다는 말만 믿고 돈을 넣었는데 웬 날벼락입니까. "

지난 3일 오전 산업은행의 영업점 창구에는 고객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이날로 만기가 돌아온 단위금전신탁 상품인 '산은성장펀드 4호(주식에 30%까지 투자)' 가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 이자는커녕 원금마저 손실을 보는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비단 이 은행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달중 만기를 앞두고 있는 상당수 은행들의 단위금전신탁 상품들이 현재 원금을 까먹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까지는 은행이 망해도 고객들은 한동안 돈이 묶이는 불편을 겪었으나 원금이 축나는 일은 없었다.

실적배당을 하는 신탁상품도 은행들이 원금에 손실이 나면 어떻게든 메워줬다.

하지만 이제 세상이 달라졌다.

올초부터 은행의 신탁부문이 완전히 독립하면서 신탁상품에서 손실이 날 경우 메워줄 방법이 없어졌다.

'이자는 낮지만 은행에 돈을 맡기면 최소한 원금은 안전하다' 는 통념이 깨지는 시점에 온 것이다.

그러나 고객들은 여전히 이런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투신사나 증권사도 아닌 은행에 돈을 맡겼는데 어떻게 원금을 손해볼 수 있느냐고 하소연한다.

은행들은 고객들의 항의에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는 처지다.

신탁 담당자들은 "주가가 너무 떨어졌고, 투신사들도 마이너스 수익률을 낸 펀드가 부지기수" 라며 변명을 한다.

그러나 1년 전 단위금전신탁 상품을 시판할 때 "실적배당 상품이니 원금에 손실을 볼 수도 있다" 고 설명했던 은행직원들은 거의 없었다.

그보다는 '은행이 파는 고금리 예금의 일종' 이라며 고객들을 끌어들이지 않았던가.

고객들도 은행탓만 할 일이 아니다. 이번의 신탁상품 원금손실은 시작에 불과하다.

내년부터는 은행이 망하면 원리금을 합쳐 2천만원까지만 보장받을 수 있도록 예금보호제도가 크게 축소된다.

2차 금융구조조정이 본격화할 경우 문을 닫는 부실 금융기관의 예금자들을 더 이상 법으로 모두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얘기다.

은행 고객들도 이제 '자기 책임하에 투자한다' 는 기본 원칙을 명심할 때가 됐다.

신예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