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신 대수술] 上. 구조조정 더이상 미룰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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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투자신탁회사들의 구조조정을 더이상 미룰 수 없다는 인식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부실이 쌓여 기관투자가 기능을 거의 상실한 투신사들을 이대로 끌고가다가는 금융시장 전체가 혼란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투신은 증권시장의 골칫거리다. 정부가 한국.대한투신에 공적자금을 넣겠다고 발표한 25일에도 증시는 오히려 곤두박질했다. 나스닥시장이 폭등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26일은 정부의 공적자금 지원대상에서 현대투신이 빠졌다는 점이 악재로 작용, 현대 계열사 주식이 무더기 하한가를 맞으며 무기력 장세로 빠져들었다.

이 때문에 장세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환매를 부추기고, 이로 인해 투신이 다시 주식.채권을 마구 내다팔아 시장이 더욱 악화되는 악순환에 빠질 것이란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대유리젠트증권 김경신 이사는 "26일 외국인들이 2천억원 이상을 매도한 것은 심상치 않은 신호" 라며 "더이상 투신 처리를 늦출 경우 외국인들이 국내증시에서 본격적으로 이탈할 수 있는 만큼 근본적인 구조조정 대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고 강조했다.

◇ 기관투자가 기능 잃은 투신〓올들어서만 3조7천억원의 주식을 순매도했다. 총선 이후 시장이 힘없이 주저앉고 있을 때도 투신은 시장안정에 나서기는커녕 환매자금 마련을 위해 팔자에 급급했다. 26일에는 무려 2천억원 이상의 주식을 순매도, 투매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D투신의 펀드매니저는 "증시주변에서 떠도는 자금들이 많아 주가지수가 뜨기만 하면 따라들어올 자금도 상당히 쌓여 있다" 면서 "그러나 섣불리 지수 떠받치기에 나섰다가 그동안 장세가 회복되기만을 기다렸던 환매요구가 한꺼번에 몰릴까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고 털어놓았다.

투신이 이처럼 제기능을 잃은 것은 두말할 필요없이 대우사태 이후 집중된 환매요구 때문. 대우 구조조정 발표 이전인 지난해 7월 1일 2백17조원에 달했던 공사채형 수익증권이 22일 현재 94조원대로 줄었다. 10개월 사이 1백23조원이 빠져나간 셈이다.

주식형은 대우채권이 포함된 공사채형이 대거 주식형으로 전환된 지난해 10월 55조8천억원에 달했던 것이 25일 현재(하이일드.후순위채 증가분 제외) 43조7천억원으로 무려 12조원이 줄었다. 올들어서만 6조2천억원이 빠져나갔다.

◇ 시장이 위험하다〓한때 수탁고에서 은행을 앞질렀던 투신이 총체적 위기에 빠져들 경우 투신만이 아니라 금융시장 전체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투신업계 관계자는 "환매요구가 견딜 수 있는 한계까지 다다른 상태" 라며 "앞으로 환매요구가 있을 때는 그만큼 주식이나 채권을 팔아 치울 수밖에 없다" 고 설명했다.

투신이 주식.채권 물량을 계속 쏟아낼 경우 주가 폭락은 물론이고 금리까지 덩달아 뛰어 하반기로 예정된 채권시가평가제의 시행도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구조조정 일정에도 차질이 불가피해진다는 얘기다.

게다가 이제 막 꽃을 피우려는 벤처 열풍에도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고, 금융시장 혼란이 중소기업 무더기 부도사태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 미봉책으로는 안된다〓25일 정부의 투신대책에 대한 시장의 반응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우선 투신부실이 한국.대한투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투신업계 전체의 문제라는 점을 정부나 업계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대한투신말고는 '알아서 하라' 는 정부나 부실을 감추기에 급급한 투신사의 태도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기만 할 뿐이라는 것이다.

정부가 총선 전에 공적자금은 더이상 추가 조성하지 않겠다고 했던 말에 얽매여 우유부단한 태도로 일관하는 것도 시장을 불안하게 하는 요인이라는 지적도 있다.

외국계 증권사 관계자는 "정부가 투신에 대한 수술에 나서겠다고 하면서도 필요자금을 어디서 어떻게 조달하겠다는 확실한 대안을 밝히지 않고 얼버무리는 것은 정부정책에 대한 신뢰도만 떨어뜨릴 뿐" 이라고 꼬집었다.

금융연구원 강종만 선임연구위원은 "그동안 정부는 투신문제에 대해 천천히 약으로 치료해오는 방법에 매달려 왔지만 더이상 약발이 먹히지 않게 됐다" 며 "이제는 외과수술 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만큼 업계와 머리를 맞대고 수술방안을 빨리 마련해야 한다" 고 강조했다.

정경민.김원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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