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북한… 지금 변화중] 5. 전국이 건설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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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김정일 총비서는 지난해 2월 9일 강원도 철원군 마정리를 방문했다. 휴전선과 바짝 붙은 이곳은 우리의 민통선에 해당된다. 북측은 그동안 눈앞에 펼쳐진 너른 평야를 빤히 보면서도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이 일대를 군대가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金총비서가 "멀쩡한 땅을 왜 놀리느냐" 며 농지정리를 지시함에 따라 이곳 사정은 돌변했다. 즉각 불도저를 비롯한 각종 중장비가 동원돼 농지정리에 들어갔고 몇달 뒤 거대한 농토가 생겼다. 지난해 이런 식으로 강원도에서 생겨난 토지만 해도 9천만평이 넘는다.

지난해 농지정리의 물결은 강원도에 이어 평안북도로 번졌고 올해 5월 말에는 평안북도 정리가 끝날 예정이다. 그 뒤로는 황해남도가 농지정리를 기다리고 있다. 북한에서 '잘 살아보세' 의 경제논리가 다른 논리를 대체해가고 있는 중이다.

'국토개조계획' 을 추진하는 북한에서는 요즘 전국이 흡사 건설현장이다. 현장마다 군인들과 각 도에서 차출된 청년건설돌격대원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기계화된 장비와 연료 부족 때문에 많은 부분을 육체노동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되지만 공기(工期)단축의 열기는 뜨겁다.

金총비서도 건설 현장을 자주 찾아 청년건설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그는 특히 평양~남포 고속도로, 개천~태성 수로, 토지정리사업 등 3대 핵심 프로젝트를 직접 챙기고 있다. 북한 당국자들은 다소 과장법을 섞어 "지도가 바뀔 대역사(大役事)" 라고 주장한다.

평양~남포 고속도로는 평양 만경대를 출발해 천산리~용강군~남포시로 이어지는 총연장 46.3㎞, 왕복 12차로의 고속도로다. 1998년 11월에 착공해 올해 10월 10일 당창건 55주년까지 완공할 계획이다.

북한은 여기에 수만명의 청년동맹 돌격대원을 투입하고 있다. 최근 평양을 다녀온 이상만(李相萬)중앙대 교수는 고속도로 건설과 관련, "북한당국이 곧 시작될 북.중 교역 활성화에 대비해 남포를 서해안 물류(物流)중심지로 육성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고 전했다.

개천~태성 수로사업은 북한 최대의 농업인프라 건설사업이다. 지난해 11월에 착공된 이 사업은 총 1백54㎞에 걸친 대규모 수로를 건설, 9만9천6백10정보에 달하는 평남 곡창지대의 농경지에서 물걱정을 덜어주려는 계획이다. 이는 북한 전체 쌀 경작면적(58만8천정보)중 17%에 해당되는 면적.

북한은 이를 위해 청천강 하류에 대규모 농업용 댐을 건설하려고 한다. 여기서 초당 수십t의 물을 취수(取水)해 평남 개천.순천.평원.대동.증산군 등 15개 군을 거쳐 남포 태성호까지 흘려 보내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저수지 19개와 터널 90개, 그리고 대형 유수지(遊水池) 4백25개를 건설한다. 북한 당국은 새 관개시스템이 완성되면 쌀 생산은 20%, 감자.밀.보리 생산은 최소 4%, 최대 30% 정도씩 증산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댐.도로.농지정리 같은 재래식 토목공사에서만 건설열기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99년 3월에 발간된 계간지 '력사과학' 에 따르면, 북한은 93년 8월 평양~함흥간 공사를 시작으로 수천㎞에 달하는 광케이블을 깔고 있다. 97년까지 평성.사리원.개성 등 66개 시.군에서 광케이블망이 완성됐으며 98년에는 평양~신의주를 잇는 광케이블 공사도 완료됐다. 지금도 광케이블 공사는 계속되고 있다.

북한은 그동안 건설부문의 경제적 가치를 소홀히 해왔다. 올 8.15에 완공될 예정으로 건설 중인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 같은 정치상징물 건설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추세는 점차 바뀌고 있다.

한국은행 북한경제팀 박석삼(朴錫三)조사역의 분석에 따르면, 98년까지만 해도 전체 건설 중 정치선전물 공사의 비중은 38.5%에 달했다. 그러나 99년에 그 비중은 7.7%로 떨어졌다. 이는 건설분야에도 실용주의가 힘을 얻고 있다는 흥미로운 단서다.

현대그룹이 북한에 매달 지불하는 금강산 관광비 8백만달러가 건설 공사비로 쓰인다는 증언도 참고할 만하다.

지난달 17일 평양을 방문한 케네스 퀴노네스(미 국무부 전 북한담당관) 박사가 북측 관리에게 관광수익의 쓰임새를 물었더니 "빛섬유 까벨(광섬유 케이블)과 물길공사에 쓰고 있다" 고 답했다는 것이다. 도로.철도.항만.전력 등 거의 모든 사회간접자본을 새로 건설해야 하는 북한 실정을 감안할 때 건설현장의 열기는 갈수록 더해갈 조짐이다.

특별취재반〓유영구.최원기.정창현.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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