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인 뉴스 <56> 예산의 일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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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정치부 기자들끼리 하는 농담이 있습니다. 예산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 정도가 의회민주주의의 성숙도와 비례한다는 겁니다. 예산을 짜는 건 정부입니다. 하지만 예산이 확정되는 곳은 국회입니다. 올해 정부가 짠 예산안 총액은 291조8000억원입니다. 삼성전자 총매출(72조9529억원, 2008년)의 네 배입니다. 이 돈의 쓰임새는 제대로 감시를 받을까요, 깎거나 늘릴 필요는 없을까요. 국회가 깨어 있어야 이런 일들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예산의 일생에 대해 우리가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하는 까닭입니다.

선승혜 기자

지역구 예산 늘리려 여당 의원은 봄에, 야당 의원은 가을에 바쁘다네요

국립국어원은 예산(豫算)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국가나 단체에서 한 회계연도의 수입과 지출을 미리 셈하여 정한 계획’. 들어오는 돈(세입)과 나가는 돈(세출)을 모두 아우른다는 뜻이다. 2010년도 예산안의 세출 규모는 291조8000억원이지만 세입 규모는 287조8000억원으로 그보다 조금 적다. 적자 가계부를 짠 셈이다. 흔히 예산안 규모를 말할 때는 세출을 기준으로 한다.

의회가 예산편성권을 갖고 있는 미국과 달리 한국은 정부가 예산을 짜고 국회는 이에 대한 심의·확정 권한을 갖는다. 정부는 1월부터 9월까지 국가재정법에 근거해 예산안을 편성한다. 그중 첫 단추는 1월 31일까지 제출토록 하는 중기사업 계획서다. 각 부처들이 5년 이상 걸리는 굵직굵직한 사업들에 대한 계획을 가져오면 기획재정부는 이를 토대로 연도별로 투자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사업들을 선정한다. 예산의 큰 그림이 그려지는 단계다.

2~4월은 어떤 방향으로 예산을 짤 건지 지침을 정하는 기간이다. 기재부는 재정운용 여건, 재원배분 방향 등을 담은 예산안 편성지침을 각 부처에 시달한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보고도 한다. 기재부는 2010년 예산을 ▶우리 경제의 정상궤도 진입과 위기 이후 기회를 선점하기 위한 지원을 적극 뒷받침하고 ▶경제위기 과정에서 악화된 재정건전성을 안정적인 수준으로 관리해 나가는 데 목표를 두고 편성했다. 재원 배분의 기본 방향은 ▶미래 성장동력 확충을 위한 재정투자의 확대 ▶서비스산업 선진화 등을 통한 양질의 일자리 창출 등으로 가닥을 잡았다.

부처 예산 더 따내려 장관이 눈물 보이기도

예결위는 마감일(12월 2일)이 되서야 문을 열었다. 7년째 헌법이 정한 예산안 처리 시한을 넘긴 것이다. 지난달 12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회의장에 2010년도 예산안 심의 자료가 쌓여 있는 모습. [중앙포토]

정부가 예산안 편성지침을 확정하면 이를 토대로 각 부처가 예산요구서를 기재부에 제출한다. 기재부 내 예산실이 칼자루를 휘두르는 시간이다. 예산실은 각 부처가 요구한 사업에 대해 감액을 하기도 하고, 기재부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사업에 대해서는 증액을 하기도 한다. 아무리 힘 있는 실세 부처라도 이때만큼은 기재부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다. 언제나 쓸 곳은 많고 돈은 모자라게 마련이라 한 푼이라도 더 따내려는 부처 간 경쟁이 벌어진다. 지난 9월 대통령이 주재하는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전재희 보건복지부 장관이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과 복지예산을 더 배정해 달라며 설전을 벌이다 눈물을 보인 일도 있다.

여당이 힘을 발휘하는 때도 이 즈음이다. 당정협의라는 절차를 통해 예산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당 차원의 요구사업을 집어넣기도 하고 실세 의원들이 지역구 사업을 챙기기도 한다. ‘여당 의원들은 봄에, 야당 의원들은 가을에 바쁘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지역구 예산을 로비하는 시기가 여야에 따라 철이 다른 셈이다. 두 달간 ‘칼질’이 끝나면 관계기관과의 협의를 거친 뒤 9월께 국무회의에서 두드린다. 국회로 넘어오기 전 최종 절차다.

예산 심사 의원들 방엔 피자 등 ‘애교성 뇌물’

10월 2일, 공은 국회로 넘어온다. 정부가 예산안을 제출하면 각 상임위는 국정감사와 대정부 질문을 마친 뒤 소관부처에 대한 예산심사를 시작한다. 부처별 예산담당자들이 의원실을 돌아다니기 시작하고,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지역구 국회의원들을 찾아다닌다. 의원회관 방마다 피자, 도넛 등 각종 간식도 돌린다. 잘 봐달라는 ‘애교성 뇌물’인 셈이다. 하지만 본게임은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시작된다. 상임위마다 증액한 사업들도 예결위에선 소용이 없다. 감액한 사업들은 반영하지만 증액사업들은 ‘제로섬’에서 출발한다. “상임위에서 늘려온 것을 모두 반영하다간 예산이 엄청나게 불어나기 때문(예결위 소속 의원실 보좌관)”이다.

예산안 소위서 늘리고 줄이는 작업 최종 결정

그 때문에 예결위는 국회의원들이 기를 쓰고 들어가려고 하는 상임위 중 하나다.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1년마다 멤버를 교체한다. 50명의 예결위원 중에서도 ‘예산안 및 기금운용계획안 조정소위원회(옛 계수소위)’ 위원이라면 더 힘이 센 의원이다. 예산을 늘리고 줄이는 작업이 최종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지난해 예산안 소위에서는 한 의원이 예산안 책자를 잃어버린 일이 있다. 같은 지역 의원들이 증액을 부탁한 사업들을 표시해 둔 책자였는데 찾지 못해 곤혹스러워했다는 후문이다. 예산안 소위장 앞에는 부처 공무원들이 줄을 서고, 여야 의원들은 물건값을 매기듯 예산 배정액을 두고 ‘흥정’을 벌인다. 예산안소위에서도 여야가 합의를 이루지 못한 사안은 위원장과 여야 간사 간 합의에 의해 결정된다. 예산안소위에서 의결된 예산안은 예결위 전체회의와 본회의 의결의 절차를 밟는다. 법정 처리 시한은 12월 2일이지만 지켜진 적이 드물다. 지난해는 12월 13일 통과됐다. 정부로 이송된 예산안은 국무회의 의결을 거친 뒤 기획재정부에서 ‘예산공고’를 내면 마무리된다. 예산의 수명은 여기까지다.


‘7년째 위헌’ 예산안 처리

일정 빡빡하고 쟁점 법안 연계 탓
연중 국회 열어 졸속 심사 막아야

올해도 국회는 헌법을 위반했다. 헌법 54조 2항은 ‘국회는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까지 예산안을 의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12월 2일이다. 하지만 여야는 2일에서야 예산안 공청회를 열었다. 마감날 문을 연 셈이다.

이로써 국회는 ‘7년 연속 위헌’이라는 신기록을 세우게 됐다. 2002년 11월 8일 예산안을 처리한 이후 국회는 한 번도 예산안을 12월 2일 전에 처리한 적이 없다. 2002년에는 대선을 앞두고 국회가 일찍 문을 닫았기에 가능했다. 1990년 이후 법정 기한을 준수한 건 다섯 차례에 불과하다. 2004년에는 12월 31일 오후 10시40분에 예산안을 처리했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번번이 법을 위반하는 모순은 왜 계속 벌어지는 걸까.

우선 정기국회 일정이 빡빡한 탓이 크다. 9월 1일부터 12월 2일까지 열리는 100일간의 정기국회는 예산안 통과뿐 아니라 교섭단체 대표연설, 대정부 질문, 국정감사와 법안 처리까지 모두 마쳐야 한다. 국정감사에서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한 뒤 11월에도 계속 충돌을 빚다 보면 의사 일정이 마비되게 마련이다. 예산안 처리가 쟁점 법안 및 정책과 연계되는 것도 원인 중 하나다. 예산은 야당 입장에선 거대 여당의 쟁점 법안 처리를 저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 중 하나다. 올해 민주당은 사실상 ‘4대 강과 예산안 처리 연계방침’을 밝힌 상태다. 이강래 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달 22일 “예산 심의는 하다 보면 최소한 크리스마스를 넘기는 게 관행”이라고 말했다. 진기록을 세운 2004년은 국가보안법 등 ‘4대 법안’을 두고 여야가 극심한 진통을 겪은 해다.


예산안 처리가 늦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23일 “국무회의 의결까지 7일, 사업 공고 및 계약 체결에 15일, 자금 배정에 7일 정도가 소요된다”며 “국회에서 예산안이 통과되더라도 정상적으로 집행하기 위해서는 30일 정도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말까지 국회에서 예산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관련법에 따라 정부는 ‘준예산’을 편성할 수 있긴 하다. 하지만 ▶헌법 또는 법률이 정한 기관의 유지 운영 ▶법률상의 지출의무 이행 ▶이미 예산으로 승인된 사업의 계속 등에 한해 사용할 수 있어 신규 사업과 지방 사업 추진은 차질이 불가피하다. 이제껏 준예산이 편성된 사례는 없다.

매년 같은 일이 되풀이되다 보니 제도적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다. 우선 ‘상시국회, 상시국감’이 가장 많이 거론된다. 지난 1월 국회운영제도개선자문위원회는 임시회를 매월 1일 개최하도록 하는 상시국회를 제안했다. 연중 국회를 열어 정기국회 때마다 예산안과 법안 처리, 국정감사가 몰려 졸속심사가 이뤄지는 사태를 방지하자는 거다.

국회가 예산 편성 과정부터 개입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우리나라는 국회의 예산심의권이 상당히 제한돼 있는 구조다. 2008년 국회는 정부 원안보다 7000억원을 늘렸다. 2007년에는 1조3000억원을, 2006년에는 3조1000억원을 감액했다. 전체 예산 규모가 200조원이 넘는 점을 감안하면 예산안의 95% 이상이 정부에 의해 결정되는 셈이다. 국회는 정부의 동의 없이 지출예산 각 항(項)의 금액을 늘리거나 새로운 비목을 설치할 수도 없다. 미국은 의회가 예산을 편성하고, 영국도 집권당 수뇌부로 구성된 내각이 예산편성권을 쥐고 있다.

이 때문에 ▶정부의 예산안 편성지침을 사전에 국회의 동의를 얻도록 하고 ▶감사원의 회계 검사 기능을 국회로 이관하는 방안(국회 헌법개정자문위) 등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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