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펌행 협상하고 있는 판사 해당 로펌 사건 맡지 말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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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A부장판사는 지난해 한 민사 재판에서 B로펌(법무법인)이 변론을 맡은 한쪽 당사자에게 승소 판결했다. 몇 달 뒤 퇴직을 한 A부장판사는 B로펌에 들어갔다. 이후 이 재판의 상대방 변론을 맡았던 C로펌 변호사의 진정서가 대법원에 접수됐다. “A부장판사가 소송 당사자인 B로펌으로 자리를 옮길 생각을 하면서 판결을 한 것은 부당하다”는 내용이었다. C로펌 변호사는 “당시 담당 재판부가 바뀌기를 바라며 재판을 늦춰달라고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법원이 진상조사를 벌였으나 판결 내용에는 문제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대법원 관계자는 “대법원의 판결이 달라지지 않아 재판에는 하자가 없다고 판단했지만 충분히 오해를 살 수 있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부장판사 출신의 D변호사는 법원에서 퇴임하기 이전에 사건을 수임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법조비리 감시기구인 법조윤리협의회가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지만 무혐의 처분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E변호사가 부장판사 퇴임을 앞두고 취업할 로펌의 관계자들과 골프 라운드를 해 구설수에 오르는 등 로펌과 판사들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

로펌의 규모와 영향력이 커지고 판사들의 로펌 재취업이 늘면서 나타난 새로운 ‘전관예우’ 논란이다. 한나라당 주광덕 의원에 따르면 최근 4년간 법원을 떠난 지방법원 부장판사 이상급 고위 법관 196명 중 54.1%(106명)가 로펌에 재취업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윤리위)가 3일 ‘법관이 퇴직 후 법무법인 등에 취업할 때 유의할 사항’이라는 긴 제목의 권고 의견을 채택한 배경이다. 윤리위는 2006년부터 법관의 정치자금 기부 금지 등의 권고 의견을 채택했으며, 이번 권고 의견은 네 번째다.

윤리위는 권고 의견에서 “법관이 취업을 목적으로 로펌 등과 접촉하거나 협상을 할 때 명예와 품위가 손상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권고 의견에는 ▶자신이 판결을 한 사건의 로펌으로 옮기게 됐을 때 상당한 기간이 경과한 후에 취업하고 ▶로펌과 취업 협상을 개시했을 때 관련 사건을 회피하도록 하며 ▶관련 사건이 많은 로펌과 취업 협상을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내용이 담겼다. 윤리위는 “법관의 개인적 이익보다는 법관의 직무상 의무가 우선”이라고 밝혔다. 법관의 공정성과 청렴성은 퇴직 이후에도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판사뿐만 아니라 검찰 고위직 출신의 로펌 재취업도 논란이 되고 있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 대한 수사를 지휘한 뒤 지난 7월 퇴직한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은 박 전 회장의 변론을 맡은 법무법인 ‘바른’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이 변호사는 “1심 재판을 맡지 않기로 했고, 박 전 회장은 오히려 검찰 수사에 협조한 인물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지만 검찰 내부에서도 부적절하다는 비난이 일었다.

법조계 관계자는 “판·검사가 로펌에 취업하면 변호사 개인의 이름이 부각되지 않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회피해야 할 사건도 고민 없이 수임하는 ‘도덕 불감증’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승현·박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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