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아트센터서 펼치는 신체극 2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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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객석을 덮칠 듯 무대에 투사된다. 이어 차창이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교통사고가 난 것. 그리고 한 여인이 괴로워한다. 붉은 조명 아래서 생명이 끊어지는 처참한 고통을 연기한다.

스르르 여인의 혼백이 빠져나간다. 일어서려고 몸부림치는 여인과 그녀의 몸에서 이탈된 혼백이 무대 양쪽에 대비된다. 세상에 대한 미련이 남아 뒤를 돌아보는 여인의 혼백이 애처롭기만 하다.

연극 '오르페오' 의 앞부분이다. 무대에 투사되는 홀로그램 영상이 연극과 영화의 경계를 보기 좋게 허문다.

배우의 실제 연기(현실)와 4차원 영상(비현실)이 겹쳐지면서 환상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배우는 아무런 대사도 하지 않지만 관객은 무대 속으로 흠뻑 빠져든다.

고도로 훈련된 배우의 몸짓과 첨단기술을 활용한 이미지가 절묘하게 어울리면서 공연예술의 색다른 맛을 한껏 드러낸다.

LG아트센터(02-2005-0114)에서 19일부터 해외 화제작 두 편을 연속 공연한다.

연극의 새로운 조류로 정착한 '신체극' 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 인간의 기초적 의사소통 수단인 몸의 언어성을 극대화한 작품들이다.

잘 다듬은 몸짓 하나면 민족.인종.국가 등의 인위적 구분을 뛰어넘어 사람들이 얼마든지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25일부터 나흘 동안 공연될 '오르페오' 는 신체극의 기본 특성에 4차원 입체 영상을 입힌 캐나다 작품. 무용.오페라.영화 등으로도 잘 알려진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사랑 얘기를 미셀 르미유와 빅토르 필론이 현대적으로 재구성했다.

독사에게 물려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만나려고 명부(冥府)를 찾아가는 오르페우스의 가슴 저린 사연을 새롭게 꾸몄다.

일단 현대판 에우리디케는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멀티 스포트라이트와 굉음으로 표현된 교통사고 장면은 국내에선 좀처럼 보기 어려운 충격적 화면을 그려낸다.

"아, 연극도 이 정도면 영화와 당당하게 겨뤄 이길 수 있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 만큼 감각적.표현적이다.

게다가 배우들의 농익은 연기가 겹쳐지면서 영화에선 좀처럼 기대하기 힘든 연극의 현장성도 살려내고 있다.

에우리디케의 영혼과 오르페우스의 몸이 만날 듯 하면서도 결국은 갈라지는 장면은 영화 '사랑과 영혼' 을 연상시키지만 영화보다 더욱 실감난다.

첨단기술을 공연에 접목하는 미래형 연극의 전범을 예감케 한다.

'오르페오' 에 앞서 소개될 러시아 데레보 극단의 '원스(Once)' (19~22일)는 '오르페오' 같은 현란한 장치나 특수 효과가 동원되지 않지만 몸의 아름다움을 아기자기하게 풀어놓은 동화 같은 작품이다.

그렇다고 만만하게 보아선 안된다. 관객들이 아무런 부담없이, 그리고 시종일관 웃음을 터뜨리며 즐길 수 있게 된 뒤에는 배우.연출자의 피나는 훈련이 숨겨져 있다.

연출자이자 배우로 나오는 안톤 아다진스키가 영하 40도가 넘는 시베리아 눈밭에서 하루 16시간의 혹독한 훈련을 통해 만들어 냈다.

배경은 한적한 바닷가의 카페. 어여쁜 웨이트리스를 사랑하는 늙은 청소부, 그리고 카페 단골신사의 사랑 다툼을 익살스럽게 처리했다.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를 닮은 듯한 우스꽝스런 동작이 푸근하면서도 강력한 인상을 남긴다.

늙은 청소부의 부탁으로 웨이트리스에게 쏜 큐피드의 화살이 번번이 빗나가는 부분에선 관객 전체가 폭소 바다로 변한다.

단순한 무대와 상징적 동작이 특징인 마임극의 요소를 충분히 소화하고, 나아가 연극의 줄거리와 음향.소품 등 무대 요소를 훌륭하게 결합한 수작이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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