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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두일 기자의 산을 오르며…] 북한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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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넉달 가뭄에도 하루만 더 갰으면 한다.'

옛사람들이 어찌 그리 콕 짚었을까 싶지만, 명치끝이 콱 막히는 듯한 말이다.

북한산 도선사에서 하루재로 10분쯤 오르면 왼쪽에 철책으로 막힌 깔딱고개 갈림길이 나온다. 휴식년제 구간으로 묶여 있는 길이다. 하루재 쪽으로 조금 더 걸으면 야트막한 능선을 가로질러 샛길 하나가 가지를 친다. 깔딱고개를 노리는 '침입자' 들이 만든 통로다.

거기에 무슨 산삼이 숨어 있다고, 사람 발길에 닳고닳은 산길을 좀 묵히자는 법을 어기면서 '하루만 더 갔으면' 하는 걸까.

인수산장 위로 인수봉의 맞받이 능선 자락에는 샘터가 있다.

목을 축이려는데 돌 위에 놓인 파란 플라스틱 바가지에 물이 가득하고 나뭇잎이며 삭정이 부스러기가 떨어져 있다.

'잘 마셨으면 버릴 일이지' 속으로 중얼대며 물을 다시 떠서 목을 축였다.

바가지를 원래 있던 돌 위에 가만히 엎는데 "물 가득 떠서 올려 놓지. 바람 불면 나동그라질 텐데…" 하는 산 선배의 말이 뒷머리를 쳤다.

깔딱고개로 무단히 꺾어드는 길을 지나치면서 굽은 지팡이는 그림자도 굽는다고 남의 흉만 보았었다.

그러나 마음눈이 깊은 사람도 있어 말없이 가르침을 준다. 개펄의 게들은 제 몸 크기대로 굴을 판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

요즘 하루재 오르는 길에는 먼지가 풀풀 날리고, 샘터에도 물이 졸아들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영동에는 상상도 못할 불난리가 나 주민들의 보금자리가 잿더미가 되고 가족들의 목숨 지키기가 눈물겹다.

당국은 전국 등산로의 90%를 5월 15일까지 막았다(http://www.npa.or.kr 참조). 영동 산불의 불씨가 어떻게 하여 붙었든 지금껏 전국 산불의 43%가 입산자의 실화였으니 당연한 비상 조치다.

불길과 사투하는 곳까지 달려가 돕지는 못하지만, 새로운 불씨를 만들 수는 없다.

평소의 90%까지는 아니라도 산행을 줄일 만큼 줄이고 버너와 라이터는 아예 숨겨 갈 생각을 말 일이다.

산에서는 당연히 금연이다. 30만원의 과태료가 무서워서만이 아니다.

옛날 조상들은 날이 가물면 기우제를 올리며 부채질을 하지 않았고 양반은 관(冠)도 쓰지 않았단다.

산에 아무리 개나리.진달래가 울긋불긋 꽃불을 질러 내 속을 달궈도, 산불에 속이 거멓게 타는 이웃이 있음을 기억한다.

먼 데 산불이 타든 말든 '진달래 구경가게 하루만 더 개었으면' 하지 않고 '샘터의 보이지 않는 마음 씀씀이' 를 배우고 싶다.

가뭄과 산불에 황사와 구제역까지 4재(災)가 겹친, 잔인한 4월이다.

배두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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