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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부터 멀어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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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프로그램 녹화 도중 기도가 막혀 의식불명에 빠진 인기성우 장정진씨가 아직까지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다. KBS-2TV '일요일은 101%'프로그램의 '골목의 제왕'중 한 코너로 진행자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고 열번 외치는 동안 참가자가 도시락에 담긴 송편을 모두 먹어야 하는 게임 도중 빚어진 사고다. 사고 소식이 알려진 후 해당 방송사의 게시판은 물론이고, 이를 보도한 포털사이트나 언론사 게시판에 방송사와 제작진을 비난하는 글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시청률 올리기에만 급급한 방송사와 제작진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 주류다.

시청률 경쟁에 매달린 방송사, 안전대책을 소홀히 한 제작진의 탓은 물론 크다. 그러나 그들만 잘못한 게 아니다. 장씨의 사고를 부른 원인은 시청자인 우리들에게도 있다.

지상파 방송의 시청자는 공짜로 방송프로그램을 즐긴다. 그 시청자를 담보로 방송사는 광고주로부터 돈을 챙긴다. 매일 아침 시험을 치고난 학생에게 주어진 성적표처럼 시간대별.지역별로 집계된 시청률 결과가 방송 관계자의 책상 앞에 놓인다. 닐슨미디어리서치.TNS의 조사 결과는 광고주에게도 그대로 전달된다. 당연히 광고주들이야 구매력을 지닌 이들이 많이 시청하는 프로그램을 선호한다.

당초 '일요일은 101%'는 지난해 10월 개편에서 공익성을 강조한 오락프로그램으로 기획됐다. 스튜어디스 등 각종 직종을 대상으로 취업 도전 체험 같은 공익성이 강한 소재를 도입했지만 시청률은 형편없었다. 결국 지난 4월 오락성을 강조하는 프로그램으로 재편되고 물벼락. 떡먹기 등 가학적인 소재가 등장했다.

실제로 방송이 시작된 초기인 지난해 11월 30일 8.4%(점유율 13.5%)이던 시청률은 개편 직전인 지난 3월 7일 7.8%(12.2%)로 하향세였다. 그러나 개편 이후 상승, 이달 12일에는 12.3%(18.4%)를 기록했다. 시청률 1% 올리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그만큼 톱스타들이 물벼락을 맞고 허둥대고, 빨리 떡을 삼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우리가 즐겼다는 증거다.

장씨의 사고로 KBS는 이 코너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사회의 여론이 따가운 만큼 KBS를 비롯한 방송사들은 당분간 가학적 오락프로그램에 대한 수위를 낮추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두더지게임처럼 시간이 흐르면 출연진을 괴롭혀 웃음을 자아내려는 프로그램들이 고개를 들 것이 뻔하다.

근본적인 치유책이 필요하다. 그 키는 시청자가 쥐고 있다. 시청률이 방송사의 목줄을 죄고 있는 만큼 좋은 프로그램을 가려 지원하는 몫은 시청자들에게 있다. 제 몫을 제대로 하려면 우선 텔레비전으로부터 멀어지는 훈련이 필요하다. 10대들이 책상에 앉으면 컴퓨터부터 켜듯, 집에 들어서기 무섭게 텔레비전부터 켜기 시작해서는 방송사의 포로 신세를 면할 수 없다. 그간 방송사가 온갖 방법으로 퍼부은 말초적 프로그램에 이미 중독된 우리들이다. 텔레비전과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강한 자극을 원할 뿐, 이를 되돌리기란 불가능하다.

머잖아 추석이다. 고향집을 찾아 전국 각지에서 모인 일가친지가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는 이 대명절은 텔레비전으로부터 멀어지기를 시도하는 데 절호의 기회다. 더구나 이번 추석 연휴는 주5일제 실시로 닷새나 된다. 대가족이 모여 즐길 수 있는 궁리를 지금부터 해보자. 윷놀이, 보드게임, 가족 노래자랑, 부모형제간에 얽힌 어린 시절 추억담 풀어내기, 주변 명소로 가벼운 나들이 가기…. 생각해보면 텔레비전 없이 지낼 방법이 무궁하다. 이번 추석에는 텔레비전부터 끄자.

홍은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