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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가 왜 만화를 그리게 됐어?" 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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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다른 듯 닮은 두 사람, 조영남과 이원복 교수가 서울 강남 청담동의 레스토랑에서 마주앉았다. 묘하게 생각이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처음 출간한 책 <먼 나라 이웃나라>가 나온 지 벌써 20여 년이 지났지만 타고난 입담꾼인 이 교수는 지칠 줄 모른다. 유럽편 6권에 일본·미국·우리나라 이야기까지 덧붙인 이원복 교수가 이제는 중국 역사를 옮기려고 팔을 걷어붙였다. 싱글벙글 웃는 얼굴 저편에 치열한 워커홀릭이 숨어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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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나라 이웃나라>를 읽으며 바다 건너 미지의 대륙에 대한 꿈을 키우던 아이들이 이제는 성장해 사회를 이끌어 가는 청장년이 됐다. 그 사이 강산이 두어 번 바뀌었고, 나라는 선진국 반열을 넘볼 정도로 성장했다. 그래도 작가는 펜을 놓지 못한다.

畵手 조영남 토크쇼 “무작정 만나러 갑니다” 23·끝 - 만화가 이원복 교수

“이제 ‘강해진 대한민국’이 보는 세계 역사를 다시 써야죠.”

만화를 그릴 수 있어 행복한 남자, 이원복 교수의 이야기다. 방송국에서 스쳐 지나간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는 처음이라는 조영남과 이 교수. 두 사람은 2학번 차이의 대학 선후배다.

조영남 왜 우리가 인연이 없었을까? 웬만하면 한 번쯤 인사했을 법도 한데. 나는 64학번인데.

이원복 저는 선배보다 한 살 어린데 재수해서 66학번이에요. 조 선배는 음대고 나는 공대니 학교에서는 한 번도 못 봤겠죠.

조영남 최근 나는 <먼 나라 이웃나라>를 다시 봤는데 처음에 못 느꼈던 것들이 보이더라고.

이원복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지금 그 책을 100% 다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조영남 수정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새로?

이원복 네. 시각이 완전히 다르잖아요. 연재하던 당시는 1980년대로 후진국에서 간신히 중진국으로 들어왔을 때여서 지금 보면 너무 선망하는 시각이 많아요. 이제는 우리도 그들 나라와 대등한 입장에서 봐야 한다는 거죠. 그들이 가진 것은 우리도 거의 가지고 있거든요.

조영남 통째로 바꾼다는 건가? 그림도?

이원복 네. 대작업이죠.

조영남 누구와 상의하며 집필했어요?

이원복 저 혼자 했죠. 1981년부터 1986년까지 <소년 한국일보>에 연재한 게 <먼 나라 이웃나라> 유럽 6권이에요. 독일로 유학 가서 연재하느라 만화를 그려 우편으로 보냈죠. 1984년 교수가 되어 귀국한 뒤 15년간은 세계사와 한국사를 학습만화로 그리는 작업에만 열중했어요.

그런데 1997년부터 일본 들락날락하다 보니 일본도 해야 할 것 같은 거예요. 일본편 완성 후에는 우리나라편을 만들었고요. 사실 <먼 나라 이웃나라> 자체가 우리를 우리 시각으로 보는 것보다 다른나라를 쭉 보면서 ‘이 나라는 이렇고, 저 나라는 저런데 우리는 왜 이런가’ 반추해보자는 의도였죠. 한국편 나온 후 제가 뉴욕으로 교환교수로 가있다 보니 이 나라는 또 다른 거예요.

그래서 미국편 3권을 내고 나서 앞으로 <먼 나라 이웃나라>는 만들지 않겠다 하고 손을 끊었어요. 그런데 얼마 전 <중앙일보>에서 중국편을 하자고 제안하더라고요. 방대해서 손도 못 댈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편으로는 ‘이때 아니면 언제 하나’ 싶기도 하더군요. ‘체력이 아직 남아있을 때 하자’는 심정으로, 마치 유작 만들듯 하고 있어요. 청조 말기부터의 근·현대사를 다루죠.

조영남 그런데 유럽편이 느닷없이 네덜란드부터 시작되니까, 이거 완전 웃기는 순서야.

이원복 (웃음)그게 왜 그렇게 됐느냐 하면, 쭉 연재하다 보니 네덜란드편 분량이 적어 100쪽밖에 안 됐어요. 책 한 권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마침 프랑스편을 시작하면서 앞에 100쪽 정도 개괄이 들어갔거든요. 미술사부터 시작해서 프랑스문화 전반을 이야기하는 부분, 그것까지 합치니 딱 1권이 되더라고. 그래서 네덜란드가 1권이 된 거예요.

조영남 이원복이 제일 처음 만든 만화가 뭐였지? 차례대로 이야기해 보자고.

이원복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신문사 주간인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와 같이 신문사에 놀러 갔어요. 친구가 “아버지, 얘가 신문반에서 만화 그려요” 하고 소개했죠. 그러자 친구 아버님이 대뜸 “너 아르바이트 해봐라” 하면서 미군부대에 돌아다니는 명작만화를 베껴오라고 하시더군요.

얇은 종이 대고 그대로 그려오라는 거였죠. 만화는 필요한데 작가한테 맡기면 원고료가 많이 드니까 그랬어요. 제가 그려오면 번역한 말풍선을 붙이는 식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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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편이 1권 된 사연, “분량이 모자라서…”

조영남 그러니까 데뷔한 작품은 뭐였지?

이원복<아이반호>. 월터 스코트의 소설을 명작만화로 만든 미국 작품인데, 제가 그걸 전부 베껴 신문에 낸 거죠. <두 도시 이야기> 같은 미국 작품들을 하다 보니 나중에는 일본만화도 베껴오라는 거예요. 일본만화는 대고 그리는 게 아니라 보고 그렸어요. 그렇게 한 3~4년 했죠.

1966년에 대학교 들어가서는 자존심도 있으니 제가 직접 창작했고요. 대학생이다 보니 원고료가 싸서 신문만화 전체를 제가 다 그렸어요. 하루에 3~4개씩 연재했죠. 하나는 이원복, 하나는 이상권, 하나는 성창경, 뭐 이런 식으로 친구들 이름을 필명으로 써가면서요.

조영남 그 밖에 이름을 댈 수 있는 것으로는 어떤 게 있지?

이원복 순정만화·공상만화·명랑만화 등 별 걸 다 했어요. 혼자 방송국 프로그램을 다 만든 셈이지. 그러다 1975년 독일에 가서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이라는 유럽여행기를 <새소년>이라는 잡지에 연재했죠. 그 이름도 제 동창생들 이름이에요. 나중에 그 작품을 읽어보니 오류투성이더군요.(웃음)

그 다음 1981년에 시작한 게 <먼 나라 이웃나라>고, 귀국 후에는 <학습만화 한국사>와 <학습만화 세계사>를 만들었는데, 이 두 작품은 그림은 안 그리고 ‘콘티’만 썼어요. 만화에서는 콘티가 거의 90%를 차지하거든요.

그 뒤 1987년 6·29 민주화선언으로 좌파·우파 난리가 나자 두산의 박용성 회장이 “자본주의·공산주의가 뭔지 가르쳐 달라”고 해서 송병락 교수와 같이 이데올로기를 만화로 만들었어요. 1990년에 만든 <자본주의 공산주의>, 이게 최초로 베스트셀러 종합 1위가 된 거예요.

그러다 다시 <먼 나라 이웃나라> 시리즈를 미국편까지 만들고 나서 생각해보니 이 책 시리즈는 선진국 중심이잖아요? 내가 보기에는 우리나라도 선진국 반열에 들어왔는데, 진정한 선진국민은 세계를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동안 내가 만든 책이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 위주로 편협하게 치우쳐 있다는 생각이 들자 지역의 이야기도 만화로 만들고 싶어져 <가로세로 세계사>를 쓴 겁니다. 발칸반도편·중동편·동남아시아편으로 구성돼 있죠. 또 중국편을 시작하면서 <먼 나라 이웃나라>도 뒤집어엎자는 생각에 다시 만들고 있는데 이 이야기는 아직 ‘오프 더 레코드’예요.(웃음)

조영남 고등학교 시절부터 합하면 거의 50년이구먼.

이원복 반 세기죠.

조영남 역사를 한눈에 관통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교육 시스템도 보편적 역사를 최소한만 가르치는데, 사실 우리도 학교 다녀봤지만 건성건성이잖아? 역사만화를 그리면서 이원복 개인의 삶을 개척했을 거 아니오. 당신은 나보다 어떤 점에서 위대하지?

이원복 없죠. 그래서 가끔 선배가 부러울 때가 많아요. 조 선배님이나 저나 소위 ‘딴따라’ 기질이 강해요. 비슷한 게 많아요. 선배도 화수(畵手)라고 해서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하는데, 사람들도 저한테 꼭 물어봐요. 왜 그렇게 이 분야 저 분야 왔다갔다 하느냐고. 그런데 사실 저는 만화나 건축이나 디자인이나 똑같다고 생각해요.

종이에 없던 것을 그리는 거잖아요? 내 아이디어, 내 꿈을 그리는 거죠. 다만 건축은 제한이 많아요. 무너지면 사람이 죽으니까. 만화는 그럴 염려가 없으니 자유롭잖아. 그래서 친구들이 부러워해요.

조영남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왜 하필 역사냐’ 바로 이거야. 왜 그 역사의 흐름을 탔느냐는 거지.

이원복 문화충격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1975년 독일에 갔어요. 1974년 서대문에서 구파발 가는 일직선 도로를 건설하는데 그 위에 독립문이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옮기라”고 지시해 이 문화유적을 들어 옮긴 거죠. 역사의식이 겨우 그 정도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게 맞는 것이었어요. 덕분에 오늘이 있는 것이고요. 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희생되는 부분도 생기니까요. 우리나라가 발전하니 청계천도 복원하고 옛 모습이 다시 살아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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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정리 박미소 월간중앙 기자 [smile83@joongang.co.kr] 사진 최재영 월간중앙 사진부장 [pressc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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