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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치’ 말할 자격 없는 국회의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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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스위스의 대표적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프리드리히 뒤렌마트가 쓴 소설 『법』은 이렇게 권력과 금력 앞에서 무참히 훼손된 법을 그리고 있다. 법은 국가와 사회를 지탱하는 대들보다. 대들보가 부러지면 집도 무너진다는 건 당연지사다. 소설 끝 부분에서 저자는 이렇게 혼잣말을 한다. “누가 죄인인가? 법을 어기는 사람인가? 법을 반포하는 사람인가?”

법을 만드는 사람이 법을 유린하는 모습을 상상 속에서 그리며 경종을 울렸던 소설가가 한국의 현실을 보면 깜짝 놀랄 것 같다. 한국의 국회의원들은 매년 최고 상위법인 헌법을 무시하고 짓밟는다. 세종시와 4대 강을 둘러싸고 여야가 온통 정쟁에 빠지면서 올해도 어김없이 위법이 판을 치고 있다.

헌법 54조2항은, 국회는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 그러니까 12월 2일까지 예산안을 의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1990년 이래 법정시한을 지켜 예산안을 처리한 횟수는 단 다섯 차례에 불과하다. 최근 6년간은 한 번도 법을 지킨 적이 없다. 위법의 일상화다. 예산안 처리가 늦어지면 다음 해 재정투자도 늦어져 경제 회복에 지장을 준다는 호소도 ‘쇠귀에 경 읽기’가 된 지 오래다.

연말이면 유행가처럼 되풀이되는 이런 부끄러운 난맥상을 굳이 또 끄집어낸 건 무감각해진 한국의 ‘법치’가 걱정돼서다. 한국 의회에는 못된 전통이 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각종 정치·사회 현안을 걸어 예산안 통과와 주고받자고 나오기 일쑤다. 이런 구태는 여당이 야당이었을 때도, 야당이 여당이었을 때도 똑같았다.

문제는 이런 위법이 되풀이되는데도 막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헌법을 위반했지만 의원들은 아무런 징계나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 이러고도 툭하면 “엄정하게 법대로 처리하겠다”고 호통을 치는 그 후안무치가 부끄러울 뿐이다. 그래서 국민이 나서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법을 어긴 의원들을 징계하고 이마저 안 되면 세비라도 깎자는 입법청원을 하자는 제안이다. 여기에 찬성하지만 국민은 의원들을 더 강하게 채찍질할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이 있다. 한 표다.

돈 때문에 콜러 의원의 무죄 방면에 도움을 준 걸 알게 된 새내기 변호사 펠릭스 슈패트는 뒤틀린 법의 현실 앞에서 고통스러워하다 결심을 한다. 정의를 세우기 위해 직접 콜러 의원을 처단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우리는 슈패트 변호사처럼 직접 행동에 나설 수는 없다. 대신 더 강력한 행동이 가능하다. 한 표로 위법 의원들을 준엄히 심판하는 거다. 법을 무시하는 의원들에게 본때를 보이는 게 현명한 유권자의 자세다.

김종윤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