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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의 Mr. X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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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8월 고 김대중 대통령의 조문단으로 서울에 온 김양건은 무척 당혹스러웠던 모양이다. MB와 현인택 통일부 장관과 만났을 때 대북 강경 입장에 부닥쳤다고 한다. 당시 MB의 발언 수위가 공개되면 지지율이 올라갈 것이라는 얘기조차 나온다. 최근 북한을 다녀온 인사는 “조문단이 큰 수모를 당했다고 하더라”고 했다. 그런데도 북한은 정상회담을 타진해왔다. 2000년과 2007년의 1, 2차 정상회담은 모두 남측 제의로 이뤄졌다.

북한은 접촉의 관행도 깼다. 1차 정상회담 당시 준비 접촉은 박지원(현 민주당 의원) 문화관광부 장관과 송호경(사망) 아태평화위 부위원장 간에 이뤄졌다. 송호경의 직책은 장관보다 한 단계 낮다. 이후 실무 준비는 임동원 국정원장-김용순(사망) 통전부장 라인으로 넘어갔다. 2007년의 2차 정상회담은 김만복 국정원장-김양건이 산파역이었다. 북한은 이번에 통전부장을 1차 접촉 대상자로 내세웠다. 초조감이 배어 있는 듯하다. 남측 Mr. X의 동선이 흘러나온 점도 의외다. 북한도 놀랐을 것이다. 1, 2차 정상회담 준비 접촉은 베일에 가려졌다. 이번에는 접촉 직후 바로 공개됐다. 보안 사고나 접촉 결렬 때문일 수 있다. 어느 것이나 남측이 접촉에 무게를 두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 사회에서 극비에 부칠 사안이 그렇게 쉽게 불거져 나오겠는가. 김양건-Mr. X 간 파이프는 막혔다고 봐야 한다. 그것이 비밀 교섭이다.

국가 간 막후 채널의 효용 가치는 크다. 독재 국가를 상대할 때 Mr. X는 더 신통력을 발휘한다. 1980년대 레이건 미 대통령의 소련 막후 파이프는 50대의 Mrs. X였다. 러시아 문화 전문가이자 작가인 수전 매시다. 20여 차례 백악관에서 레이건을 만났고, 밀사 역할을 했다. 상대는 모스크바의 미국·캐나다연구소 보그다노프 부소장이었다. KGB 요원이다. 이 연구소는 레이건의 대소 봉쇄정책으로 영향력이 커졌다. 62년부터 주미 대사를 맡았던 도브리닌의 활동이 예전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련은 매시-보그다노프 채널을 통해 메시지를 보냈다. 미국의 선제 핵 타격에 대한 공포와 개혁파 고르바초프 서기장 입지 약화 등이 전달됐다. 그녀의 보고는 레이건의 대소 태도를 누그러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82년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했던 레이건은 대소 군축 협상을 모색했고,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정상회담을 한다. 보수의 화신이던 레이건의 일대 변신이다. 매시는 레이건에게 소련의 창이기도 했다. 러시아 문화 가정교사였다. 레이건의 대소 협상 원칙으로 알려진 ‘믿어라, 그러나 검증하라’는 그녀가 가르쳐준 러시아 속담이다. 레이건은 이를 고르바초프를 만날 때마다 들먹였다.(제임스 만, 『레이건의 반란』)

남북 관계는 특수하다. 상호 공관이 없다. 직통선으로 연결돼 있을 뿐이다. 대통령의 Mr. X는 불가피하다. 문제는 Mr. X를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레이건의 Mrs. X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통제를 받았다. 조지 슐츠의 국무부도 일부 꿰고 있었다. 제도의 틀에서 움직였다. 이제는 남북 채널도 새 판을 짤 때가 됐다. 회담이 공개됐을 때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절차와 기관이 중요하다. NSC와 통일부가 중심 고리가 돼야 한다. 국민적 공감을 얻는 투명성의 요체는 여기에 있다. 통일부는 80년 안기부(국정원)로부터 남북대화사무국(남북회담본부)을 물려받았다. 북한엔 정상회담으로 가려면 장관급 회담을 거쳐야 한다고 요구해야 한다. 통일부 장관과 북한 내각 참사 간이 아닌 통전부장과의 회담 말이다. 정상회담은 얼마든지 그 테이블에 오를 수 있다. 이것이 남북 관계의 정상화(正常化)다. 남한의 Mr. X는 제도다-. 현 정부는 지금 그 길을 뚫고 있다고 믿는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

오영환 외교안보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