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0년째 긴 명상' 임수혁 선수는 지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왼쪽부터, 병상의 임수혁-롯데 선수시절 건강한 모습. (중앙포토)


“나는 23년간 늘 깨어 있었다. 사고가 난 후 계속 소리를 쳤지만 아무도 내 말을 듣지 못했다. ”
1983년 교통사고로 '식물 상태' 판정을 받은 롬 하우번(벨기에)은 최근 의식을 차린 뒤 “내가 의식이 있는데도 아무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해 정말 절망스러웠다”고 말해 화제가 됐다.

2000년 프로야구 경기 중 한 선수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는 인근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조치를 받았지만 일시적으로 뇌에 산소공급이 되지 않아 의식을 찾지 못했다. ‘식물상태’ 판정을 받은 롯데 자이언츠 임수혁 선수. 10년째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그는 외국에서 들어온 이 소식을 알고 있을까.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26일 오전 서울 강동구 명일동 주택가의 한 병원 요양센터에서 부인 김영주 씨를 만났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임수혁 선수는 두 눈을 뜨고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침대 옆에 앉아있는 김 씨에게 인사를 건네는 순간 그는 하품과 함께 재채기를 했다.
깜짝 놀라 김영주 씨를 쳐다봤다. 김 씨는 “재채기와 하품은 반사작용이다. 마지막 남은 신체적 기능”이라고 말했다.

“식물상태 판정을 받은 환자가 ‘23년간 깨어 있었다’는 뉴스가 나왔다”고 말을 건네자 “28년 만에 의식을 되찾았다는 뉴스도 들은 적이 있다”는 차분한 반응이 나왔다.
혹시 임수혁 선수가 들을까 봐 병실 밖으로 장소를 옮겨 이야기를 이어갔다.
“남편도 훌훌 털고 일어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습니다."
"…"
2000년 4월 18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벌어진 LG와 원정경기에서 임수혁은 2회 초 2루 주자로 서있다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가까운 강남시립병원(현 서울의료원)으로 옮겨져 심폐소생술로 생명은 건졌지만 의식을 찾지는 못했다. 그는 다시 아산중앙병원으로 옮겨져 뇌손상 여부를 검사받았다. 당시 부산에 있던 김영주 씨는 밤새 승용차를 몰고 서울로 올라와 담당의사를 만났다.

의사로부터 "(다시 깨어날 가능성은) 99% 없다. 1%가 있다면 그것은 기적을 바라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MRI 촬영 결과 임수혁 선수는 뇌 전체가 손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 녀는 그 말을 곧이 듣지 않았다.
"하루만 지나면 깨어나겠지" "1주일만 지나면…" "한 달만 지난면…"
이렇게 한달이 가고, 1년이 가고, 2년이 흘렀다. 그사이 한방치료, 대체의학 등 기댈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남편은 일어날 줄 몰랐다.
"(남편이 깨어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죄절감은 더 깊어졌습니다."
자칭 전문가들이 "한 달이면 벌떡 일어서게 만들어 주겠다"며 줄지어 찾아왔다고 한다. 그때마다 '남편이 꼭 깨어날 것'이라고 큰 희망를 걸었지만 기대는 번번이 빗나갔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지쳐갔다고 했다.

"어느 날 '아, 이렇게 살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어요."
남편에만 매달려 있는 사이 두 자녀(아들·딸)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마음을 바로잡았다. 그 녀는 '아빠 중심'이던 생활을 '아이 중심'으로 바꾸었다. "제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다 하겠지만…. 제가 해야 할 일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남편이 기적적으로 깨어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알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의 많은 부분을 아이들에게로 돌렸다. 남편이 언젠가 깨어났을 때 "아이들이 그래도 행복하게 살았구나" 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기에….

그동안 아이들도 예상치 못한 상처를 받았다. 학교에서 심폐소생술의 중요성을 가르쳐줄 때 보조자료로 보여준 사진이 바로 '아빠'의 모습이었다. 친구들이 수근거렸다. 아들은 그때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일이 반복됐고, 아이들은 여러 번 학교를 옮겨야 했다.

김 씨는 올해 또 한 차례 가슴아픈 일을 겪었다. 연명치료 중단을 허용한 대법원의 판결이 나오자 방송사에서 카메라를 들고 자신을 찾아와 "존엄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런 상황을 피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서 피해 다녔습니다."
그녀는 끝내 꾹 참았던 눈물을 보였다.

-남편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습니까.
"의식이 있다면 무슨 힘으로 버틸까, 말을 못해 화병이나 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해봤습니다."
-그럴 가능성도 있겠습니다.
"아이들이 씩씩하게 커가는 것을 느끼며 잘 참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88학번인 임수혁·김영주 부부는 대학 1학년 때 만나 6년 열애 끝에 임수혁 선수가 롯데에 입단한 1994년 결혼했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가장 행복했던 31세 여성에게 시련이 찾아왔고 남편 간호하고, 돈 벌고, 아이 키우는 '1인 3역'을 하며 힘들게 살고 있다.

"동료 선수들과 팬들의 도움이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찾아올 때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라는 말 밖에 전할 수 있어 안타깝다"는 그녀는 결국 '남편이 깨어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드러냈다.
"그 분들이 찾아올 때 한 번만이라도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는 말을 전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노태운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