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길 산책] 사라져가는 희미한 기억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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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경기도 가평읍에서 사창리로 넘어가는 길은 봄이 늦다. 아랫녘에선 꽃소식이 전해진지 이미 여러날 됐지만 길을 따라 흐르는 개울에는 아직도 얼음이 서걱서걱하고 산자락 후미진 곳엔 너테가 지난 겨울을 증거하고 있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쨍한데 한 곳에서 저녁연기가 피어오른다. 어릴적 학교 갔다 오는 길에 노을지는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곤했던 그 정경이다.

당시 저녁 연기는 허기와 따스함을 보장해주는 그야말로 '등따습고 배부름' 이 한덩이로 와닿는 복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해거름에 때맞춰 거렁뱅이가 비럭질 손을 벌리면 차마 떨치지 못했던 게 시골인심이었다.

정신을 수습해 연기가 오르는 곳으로 걸음을 재촉하니 여산(女山)인 명지산을 바라보며 남산(男山)인 화악산 자락에 깃들고 있는 관청마을(가평군 북면 도대2리)이다.

두릅나무가 열병하고 있는 길이 끝나기를 기다려 객쩍게 문을 두드리니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피며 쇠죽을 쑤던 노인장이 반가이 길손을 맞는다.

외양간에는 암소가 송아지에 젖물리며 눈을 부라리고, 부뚜막이며 황토바른 벽이 온통 검댕이로 그을린 채 코뚜레.새창아.맷태.종댕이.통발을 달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자랄 때 우리집이다.

"아직도 나무로 불을 때시네요" "보이라를 때는 집덜도 있긴 하지만 원 지지는 맛이 없는 데다 당최 화로를 쬘 수가 있어야지…"

예전같으면 이맘때 시골에선 여름나기 땔나무를 해대느라 한창 정신이 없었다.

가을에 해뒀던 나무더미가 겨울을 나는 사이 대부분 축이 난데다 부지깽이도 함께 뛸 정도로 손돌릴 새 없는 영농철에 대비한 준비성이다.

숲이 넉넉한 산골에선 삭정이를 분지르거나 고주박만 캐 모아도 집채만한 나뭇가리가 한 두채가 아니요 솔가리.가랑잎의 갈퀴나무도 가늠량을 채우기가 여반장(如反掌)이지만 들판이 너른 벌마을에선 볏짚이 안썩었나 뒤적여보고 봇두렁.갯가에 난 갈대며 억새 등 풀동치기가 고작이었다.

이때문에 어디서 산판이 벌어졌다는 소리라도 들릴라치면 남녀노소 가릴 것없이 달려가 졸가리라도 얻을 량으로 머리를 조아리곤 했다.

땔나무중 제일은 때기 좋고 등걸불이나 숯을 쓸 수 있는 참나무 장작으로 묵은 장작이 얼마나 있느냐가 그집 며느리의 살림살이 솜씨에 대한 가늠자가 될 정도였다.

시량(柴糧)이 한속이니 이다지 법석을 떨 수밖에. 이러다보니 웬만한 시골도 산이란 산은 죄다 민둥벌거숭이가 돼 멀리는 조선때 송금절목(松禁節目)이니 금산(禁山)이니 하는 조치가 있었고, 가까이는 고을마다 산림간수가 희짓고 다녀 나뭇꾼들에겐 염라대왕같은 존재였다.

땔나무는 대부분 머슴들의 차지라 산골에 처박혀 늦도록 장가도 들지 못하고 산이나 헤매는 신세타령을 하곤했으니 '어사용' '산타령' '갈가마귀타령' 이라 불렸다.

하지만 '낫갈아 허리에 차고/도끼 벼려 둘러메고/(중략)/삭다리 마른 섶을/베거니 베이거니 지게에 짊어/(중략)/석양이 재넘어 갈제 어깨를 추이르며/긴소리 짧은 소리하며 어이갈꼬 하노라' 하는 멋드러진 사설도 남긴 걸 보면 반드시 고달픈 것만은 아니었으리.

이만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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