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찰스 핸디의 '홀로 천천히 자유롭게' - 현대판 연금술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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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선천적 난독증으로 학교에서 열등생으로 낙인 찍힘. 열한살 때 각종 대회를 휩쓴 축구선수였으나 태클에 걸려 연골을 다쳐 선수생활 포기. 상업에 눈을 돌려 텃밭에 크리스마스 트리 농원을 차렸지만 토끼 떼가 다 먹어 치워서 실패. 잉꼬를 길렀지만 팔 곳이 없어 돈만 날림.'

이렇게 억세게 운나쁜 사람이 있다는 것도 믿기 어렵지만 바로 이 사람이 연간 총수입 20억 파운드(한화 3조6천억원)의 거대 상업 제국을 건설한 버진 그룹의 창업자인 리처드 브랜슨 회장이라면 더욱 믿기 어렵다. 그러나 사실이다.

최근 한 영국 주간 신문의 여론 조사에서 '가장 똑똑한 남자' 로 뽑힌 브랜슨은 이처럼 타고난 천재도, 특별히 행운아도 아니면서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어낸 사람이다.

특별한 재능도 없이 어떻게 이같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면 '홀로 천천히 자유롭게' (찰스 핸디 지음.김진준 옮김.생각의나무.1만3천원)을 읽어봄직 하다.

브랜슨이나 브리티시 항공 로버트 에일링 회장 등 몇몇 사람 외에는 이 책에 소개된 29명은 대부분 생소하다.

시장에서 실크 스카프를 파는 흑인 여성 조앤 맥팔레인이나 정원사 스티븐 우덤스 등이 포함된 것으로도 알 수 있듯 이 책이 말하는 성공의 기준은 일반적인 잣대와는 사뭇 다르다.

대부분의 성공서가 빌 게이츠처럼 남다른 인물의 남다른 삶에 관심을 갖지만 이 책은 인물보다 벤처정신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들을 성공으로 이끈 동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저자는 무(비금속)에서 유(금)를 만들고자 했던 연금술사처럼 이들도 자신의 상상력으로 특별한 것을 창조한 '현대판 연금술사' 라고 부른다.

브랜슨만 해도 무일푼으로 시작해 지금의 제국을 일궜다. 그 원동력은 '재미' 였다.

끊임없는 실패에도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믿었다.

'망하는 지름길' 이라는 충고에도 흔들리지 않고 항공사 버진 어틀랜틱을 세워 수익을 올리고 있다.

총수입 2백50만 파운드를 올리는 리크루트 잡지 '인적자원' 발행인 마틴 리치도 마찬가지. 주위에서는 한결같이 가능성이 없다는 반응이었지만 자기자신을 믿고 밀어붙였다.

하지만 주인공 모두가 이렇게 용기있는 사람들은 아니다.

이동전화 도매상 카폰 웨어하우스 설립자 찰스 던스톤은 성공의 밑거름을 '자신감의 결여' 로 설명한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은 아예 안하는 소심함이 고객들의 신뢰를 얻게 해 지금의 성공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개방 대학 등 49개의 단체를 설립한 마이클 영처럼 실패를 맛보지 않은 사람도 물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실패를 경험했다. 나아가 실패가 성공의 계기가 된 경우가 많다.

HMV미디어 그룹 팀 워터스톤 회장은 20년 직장생활 끝에 해고 당했지만 정작 그의 인생은 이때 시작됐다.

이 책 주인공들의 공통점은 '하고 싶은 일을 한다' 는 것이다. 오직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때로 모험을 감수하고 질시를 견디며 실패도 교훈으로 삼았다.

1994년 '텅빈 레인코트' 와 '헝그리 정신' 으로 '올해의 경제평론상' 을 수상한 영국의 경제평론가이자 방송인 찰스 핸디가 쓴 이 책은 성공지침서는 아니다.

당사자와 인터뷰한 것만을 재료로 삼았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서도 될 수 없다. 단지 본인이 말하는 성공의 비결일 뿐이다.

30대에서 80대, 런던 토박이에서 우간다 출신에 이르기까지 각자 배경은 다르지만 모두 런던에서 활약하고 있는 사람만 대상으로 삼은 것은 "'연금술사' 를 배출하는 환경은 그 도시가 만들어낸다" 는 저자의 생각때문이다.

한 사람의 얘기가 고작 다섯쪽에 불과해 깊이가 부족한 점도 없지 않다. 하지만 본인들이 직접 선택한 장소에서 저자 부인이 찍은 사진 몽타주가 부족한 곳을 채워준다.

안혜리 기자

현대판 연금술사 공통분모

▶유전자가 인생을 좌우하지 않는다.하지만 가정은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 철학자 사르트르는 '아버지가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일찍 죽는 일' 이라고 했지만 주인공들 가운데 아버지가 요절한 경우는 없었다. 돈의 유무와 상관없이 대개 안정되고 행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IQ와 창의력은 무관하다. 다만 훌륭한 교사가 필요하다.

- 주인공의 절반이 열여섯살에서 열여덟살 사이에 학교를 떠났다. 학교는 공부 이외의 그 무엇, 즉 그들의 남다른 점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중하기 보다 즉흥적이다.

- 즉흥적이라는 말은 기회를 잘 포착한다는 말이다. 주인공들은 대부분 선택을 요구하는 결정적인 사건을 경험했다. 이때 차근차근 경로를 밟기보다 우연한 기회를 잡았다. 계획성은 오히려 눈가리개가 돼 기회를 못보게 할 수도 있다. 행운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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