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2000] 머리는 디지털, 가슴은 아날로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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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며칠 전 '매트릭스' 라는 영화를 보았다. 가상현실과 현실세계간의 구분이 모호해질 미래 세계의 모습을 선구적으로 그린 영화다. 신세대 감각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영화라는 평은 익히 들어왔다. 일부 젊은 매니어들은 이 영화를 우상으로 숭배한다고도 한다.

과연 이 영화는 획기적인 면이 많았다. 최첨단 디지털 기술로 완벽하게 구성된 새로운 문명에서 군대가 전화선으로 이동한다는 등 이야기 전개도 그렇고, 화면의 제작 역시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적어도 영화의 문법에서는 지극히 전통적이고, 따라서 보수적이었다.

비록 기술이 혁신적으로 발전돼 가도 결국 사랑과 믿음만이 구원을 가져올 수 있다는 메시지는 아날로그 시대의 영화나 다름이 없었다. 과연 이러한 구식 메시지가 신세대의 환호를 받는다는 것이 의아해질 정도였다.

이같은 '최첨단과 최구식' 의 교묘한 결합은 최근 세간에 화제가 됐던 김용옥의 강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쪽에서는 디지털이나 코스닥 열풍이 불고 있는데, 느리게 가고 마음을 비우라는 노자의 목소리가 '문화현상' 으로까지 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명상서적이 거의 벤처산업이 되고, 세계의 오지 여행기가 베스트셀러가 된 지는 오래다.

게오르그 가다머.자크 데리다.지안니 바티모 등 유럽의 지성인들도 21세기에는 '종교적 심성' 이 강력하게 복귀할 것을 예견하고 있다.

리처드 기어 등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티베트로 몰려가고 있지 않은가. 디지털을 화두로 한 현대 문명은 기술적으로는 최첨단을 달리고 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디지털은 모든 것을 바꾸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하늘 아래 정말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따라서 인터넷 서점 아마존처럼 최고속의 기술에 최고의 '구식(舊識)' 을 결합할 때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정 새로운 문명이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조형준<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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