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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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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자동차 용어에 연비(燃費)라는 말이 있다. 자동차가 1ℓ의 연료로 달릴 수 있는 거리를 나타낸 수치다. 이를 통해 자동차의 에너지 소비효율을 알 수 있다.

각 차종의 공인 연비는 산업자원부가 지정한 시험기관에서 측정한다. 도로 사정을 감안한다고는 하지만 운전 습관이나 교통상황에 따라 실제 연비는 이보다 상당히 낮아지는 게 보통이다. 특히 가다 서기를 자주 반복하면 연비는 더 낮아진다. 반대로 한번 가속도를 붙여 일정한 속도로 운전하면 연비가 높아진다.

일본의 경제평론가 사카이야 다이치(堺屋太一)는 이런 원리가 경제정책에도 적용된다고 말했다. 경기부양을 위한 가속 페달과 과열을 막기 위한 브레이크를 너무 자주 번갈아 밟을 때가 그렇다고 한다. 물론 정책당국은 경제의 안전운행을 위해 가속 페달과 브레이크를 적절히 밟아줘야 한다. 그러나 초보 운전자가 가다 서기를 반복할 때 연비가 낮아지듯 경제정책도 신경질적으로 미조정을 하면 효율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 경우 경기부양에 들어간 연료인 재정자금이 제대로 출력을 내지 못한다. 사카이야는 일본 경제가 장기 불황에서 더 빨리 벗어나지 못한 책임을 일본 정부의 운전 미숙으로 돌리기도 했다. 경기가 조금 살아난다 싶었던 1997년 가속 페달을 더 밟지 않고 소비세 인상과 긴축재정이라는 브레이크를 밟았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시각이 있다.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낸 모 교수는 사석에서 "경제는 키울 수 있을 때 과감히 키워놓는 게 좋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중에 급정거를 하더라도 달릴 수 있을 기회가 오면 가속 페달을 꾹 밟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학자 입장에선 할 얘기가 아니지만 관직에 들어가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지난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콜금리 목표치를 연 3.5%에서 유지하기로 했다.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는 게 동결 이유다. 이를 가리켜 이헌재 경제부총리는 '아쉬운 조치'라고 했다. 가속 페달을 더 밟아야 할 때인데도 너무 조심운전을 한다는 불만의 표시인 듯하다. 그렇다면 경제정책의 연비가 자꾸 떨어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안전운전을 하고 있는데도 공연히 조급해 하는 것일까.

남윤호 정책기획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