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퇴직 고위공직자들의 염치없는 재취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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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공적 정보가 사기업의 이익에 유용되는 것을 막기 위한 공직자의 ‘퇴직 후 취업 제한 규정’이 사문화 지경에 이르렀다. 공직자들의 윤리의식이 법규를 지키기에는 너무나 희미한 까닭이다. 행정안전부가 최근 실시한 퇴직 공직자 취업실태 조사 결과를 보면 정부가 오히려 고위 공직자들을 사기업들을 위한 로비스트로 양성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갖게 된다. 2006~2008년 사이 211명의 고위 공직자가 취업 제한 대상인 영리 사기업체에 취업했다. 그중 의무사항인 공직자윤리위원회의 심의도 받지 않고 멋대로 취업한 사람도 68명이나 된다. 장·차관급도 다수다. 검찰 고위직이 퇴직 후 자신이 수사하던 피의자나 기업의 변호를 맡은 법무법인에 취업하는 사례도 연례 행사처럼 벌어진다. 법무부에 따르면 2005년~2009년 6월 모두 42명의 퇴직 검사가 취업 제한 대상 업체에 취업했다. 상황이 이 정도니 이들이 현직에 있을 때 제대로 된 감독이나 수사는 공염불이 아니겠는가.

더 큰 문제는 윤리위원회 심의가 형식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2005년 이후 908명의 퇴직 공직자가 심사를 받았지만 96%가 ‘취업 가능’ 판정을 받았다. 공직자윤리법은 ‘퇴직 전 3년간 맡았던 업무와 연관이 있는 기업 등에는 퇴직 후 2년간 취업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으나 유관 기관에 재취업한 고위 공직자가 10명 중 8명이나 됐다. 겉으로 제한 규정을 만들어놓고 속으로는 제 식구 밥그릇 챙겼다는 것밖에 안 된다. 행안부는 법을 무시한 임의 취업자에 대해서도 사생활 보호라는 이유로 이름을 공개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러니 행정부처의 인허가 대상이던 기업 또는 사정당국의 수사 대상 기업에서 이들 퇴직 공무원을 통해 불법 로비를 벌인 의혹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다. 그 같은 의혹은 행정과 사법의 불공정 시비를 낳고 효율을 떨어뜨려 국가적 손실로 이어진다. 공직자들이 취업 제한 규정의 취지를 존중하고 모럴 해저드의 유혹을 떨쳐버려야만 공직사회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되살아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