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세상 첫번째 이야기 - 김장 담그는 시골 면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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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균 천안시 북면장이 마을 주민들과 함께 경로당과 홀로 사는 노인들에게 전달할 김장을 하고 있다.

매일 아침 간밤 마을에 별일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러 굽이 냇가를 돌아 면사무소를 향해 차를 몰아 출근한다. 20여 분 걸리는 출근길, 가끔 상념에 젖어 어릴 때 기억을 떠 올리기도 한다.

당시 면장은 시골 우리 집에 오는 제일 웃어른 중의 한 명이었고, 그나마 자주 볼 수는 있는 손님이 아니었다. 면서기나 산감(山監·산을 감독하는 사람)은 가끔 와서 막걸리 또는 잘 익은 동동주를 어른들하고 마시고 해질 녘에 돌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면장님’을 집에 모시기란 쉽지 않았다.

그 시절 면장이 오는 날은 사랑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앞마당과 바깥마당을 싸리비로 쓸었다. 누추한 집을 방문하는 데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기 위함이었다. 면장이 집을 나서기까지 집안의 여자들은 분주하게 부엌을 드나들었고 광문을 여닫았다. 그래도 혹시나 있을 바깥양반의 호통을 두려워하면 긴장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 추억을 갖고 있는 내가 산 좋고 물 맑은 천안 북면의 면장이 된지 1년 남짓 됐다. 요즘은 면장을 집으로 초청하는 경우는 드물다. 혹여 면장에게 술밥 대접이라도 할라치면 인근의 식당으로 부른다. 그윽한 시골의 사랑방의 맛은 나지는 않더라도 삼겹살에 소주 한 잔에서 나오는 넉넉하고 너그러운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별 다름이 없으니 즐겁고 행복하다.

어떤 마을 이장이 “내일 동네 어른신분들을 모시고 점심을 대접하기로 했으니 면장이 좀 와야겠다”고 한다. “예! 가야지요!”

서로 마주 앉으면 풋풋한 정담이 오간다. “우리 동네에서 누구는 시청 과장인 것은 아시지요.” “이 양반 둘째 아들은 파출소장이요.” “이 양반 사위가 검찰청에 있소.” “이 분 자제는 학교 선생이요.” “나는 6.25 전쟁 때 큰 공을 세운 사람이요.”

어디에서 이런 자랑스러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이 고장에서 출생해 자란 사람이 대처에서 출세를 해서 고위직에 있는 분들이 한두 분이 아니고 또한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도 많다. 그 중 내가 아는 사람도 더러 있다. 그런 잘 된 사람이 우리 마을에 있어 동네 분들이 자랑스러워하니 그 분들이 고맙기까지 하다.

면장은 늘 행복하다. 벼 수매하는 날에는 농민을 모두 볼 수 있어 좋고, 윷놀이 행사에 가면 사물놀이에 막걸리를 권하며 환영하니 더욱 즐겁다. 마을 기원제에 가면, 면장이 먼저 절하게 하며 축원하게 한다. 고향 방문의 날, 동창회, 체육대회, 생일에도 면장을 ‘얼굴마담’으로 생각해 줘 부른다. 고마운 일이다. 더구나 불만스런 일이 있어 면 직원에게 소리를 지르다가도 면장을 보면 살며시 누그러뜨리는 소박한 주민들이 어디 또 있겠는가?

시골면장은 배도 조금 볼록해 없어 보이지 않아야 하고, 흥나는 자리에선 노래 한 가락할 줄 알고, 여러 사람과 한 잔 술을 나눌 줄 알아 흉허물이 없어야 한다. 또 사람 속이 좋아 아무나 잘 만나줘야 한다. 잘 생긴 면장보다는 막걸리를 좋아하는 동네 아저씨 같은 촌스러운 면장이면 더욱 좋다.

오늘은 새마을지도자들이 김장을 담근다고 오란다. 여러 마을의 경로당과 홀로 사시는 노인들에게 드린다고 함께 담그자는 것이니 어찌 마다하겠는가. 시골면장은 김장을 담글 줄 알아서 권위의 탈을 훌훌 벗을 수 있으니 날마다 즐겁고 행복하다.

오동균(천안 북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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