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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4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47. 어림없는 개발비

중수로(重水爐)핵연료를 독자적으로 개발하기란 예상외로 어려웠다. 캐나다가 중수로 핵연료를 개발하는 데 캐나다 달러로 무려 10억달러이나 들었다는 얘기가 정말 실감이 났다.

1982년 당시 환율로는 약 6천억원이나 되는 거액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개발비는 고작 19억1천만원으로 그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먼저 캐나다에서 구입한 중수로 핵연료를 보고 역(逆)설계를 했다. 다시 말해 실물의 크기를 재고 모양을 본 뜬 다음 재료와 특성 등을 하나하나 분석해 우리식 설계를 한 것이다.

일종의 복사본을 만든 셈이다. 그러나 아무리 복사를 잘 했어도 막상 실물을 만들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첫번째 어려움은 길이 1.5㎝, 직경 1.2㎝ 가량의 작은 원통형 우라늄 덩어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 우라늄 덩어리를 '펠릿' 이라 불렀다.

우라늄 가루를 1700℃나 되는 고온에서 8시간 구워 펠릿을 만들어내야 했다. 이는 생각보다 고도의 기술을 요구했다. 연구진은 수없는 실험을 반복한 끝에 마침내 펠릿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또다른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펠릿을 길이 50㎝, 직경 1.3㎝짜리 지르코늄 합금(zircaloy)으로 만든 막대 모양의 봉(棒)에다 채워넣은 다음 양쪽 끝을 밀봉(密封)한 연료봉을 37개 모아 이를 한 다발로 묶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접을 해야 하는데 용접기술이 매우 까다로웠다.

용접을 세게 하면 연료봉에 구멍이 생겨 우라늄 연료가 손상된다. 반대로 약하게 하면 연료봉 사이의 간격을 메워주기 위해 각 연료봉에 붙어 있는 작은 지르코늄 합금조각이 떨어져 나가 원자로에서 사고를 일으킨다. 용접공들은 너무 긴장한 탓인지 구슬땀을 흘리곤 했다.

시행착오를 되풀이할 때마다 우리는 맥이 빠졌다. 그러나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그만큼 우리 손으로 해내고야 말겠다는 열의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땀흘린 보람이 나타났다. 37개 연료봉을 한 다발로 묶는 데 성공한 것이다. 중수로 핵연료 시제품(試製品)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이때가 1983년 1월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니었다. 마지막 관문인 성능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만약 이 시험에 통과하면 천만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지금까지 우리의 수고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우리가 가장 조마조마하게 생각했던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솔직히 캐나다에서 들여 온 핵연료를 꼼꼼히 분석해 시제품을 만들긴 했지만 그 성능이 어떨지는 아무도 자신할 수 없었다.

통상 중수로 핵연료는 원자로에서 연소되기 전과 1년간 연소된 후의 모양이 똑같아야 한다. 또 원자로에서 탈 때 처음 설계대로 열량이 나와야만 한다.

그러나 핵연료의 성능이 좋지 않을 경우 원자로에서 타는 동안 모양도 변하고 열량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바로 이같은 결과를 알아보는 것이 성능 시험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에는 우리가 만든 핵연료 시제품의 성능을 시험할 수 있는 실험용 원자로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캐나다 초크리버연구소에 있는 재료시험로(NRU)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재료시험로는 그 무렵 캐나다가 보유한 원자로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커 어떤 실험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재료시험로를 이용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나는 우리 연구진이 중수로 핵연료 시제품 개발에 성공할 경우를 대비해 캐나다 원자력공사(AECL)와 사전 접촉을 했다. 시제품의 성능을 시험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캐나다측은 실험비로 캐나다 달러로 3백달러를 요구했다. 82년 환율로 약 17억8천만원이었다.

우리가 핵연료 시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2년간 사용하기로 되어 있는 연구개발비와 거의 맞먹는 액수였다.

우리에게는 너무 큰 부담이었다. 산 넘어 산이었다.

글= 한필순 전 원자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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