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연의 세계일주] 당신의 관심을 보여주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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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도 없이 그저 '은주'라고 불리는 50대 여스님을 만난 곳은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였다. 한국 여자가 묵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 벌써 떠났을까 부랴부랴 달려오셨다며, 해맑은 얼굴에 웃음을 담뿍 지으시던 은주 스님. 소녀 같은 이름 '은주'로 알려진 내력이 궁금해 법명을 여쭸더니 "나 같은 땡중에게 법명이 어딨어?"라며 시원스레 미소를 지으셨다.

"난 은주라는 이름이 좋아. 어려운 법명보다 부르기도 쉽고, 나이도 어려 보이잖아?"

명랑하고 에너지가 넘쳐 옆에 있는 사람들도 덩달아 기운이 솟는 아름다운 분이다. 아디스아바바의 한국촌에서 봉사활동 중이라고 하셨다. 10년 전 처음 이 땅과 인연을 맺었고, 가슴 아픈 현실에 마음을 빼앗겨 여러 일을 도모하셨다고 한다. 이곳에 남아 봉사 활동으로 생을 마치고 싶다며 초롱초롱한 두 눈을 빛내실 때면, 그 소녀 같은 모습에 절로 마음이 뭉클해졌다. 불교에 귀의한 특별한 동기가 있을까 여쭈었더니, 엉뚱하게 내게 남자친구가 있는지 되묻고서는,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난 말이야, 보는 순간 눈에 불꽃이 팍 튀면서 '아… 이 사람이다!'하고 느껴지는 사람이 나타날 줄 알았어. 그런데 서른이 넘도록 그 놈은 어디 숨었는지 안 나타나더군. 그래서 중이 되기로 했지, 뭐."

이렇듯 소박하고 순수한 스님이 몸담고 있는 한국촌은 그 역사가 참으로 가슴 아픈 곳이다. 1992년 창설된 이곳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6000여 에티오피아 군인이 귀국해 정착한 마을로, 정부의 핍박과 가난으로 험난한 길을 걸어왔다. 정부의 명령으로 먼 한국까지 찾아가 열심히 싸우고 돌아왔건만 귀국 후 이들을 맞은 것은 따스한 환영 깃발이 아닌, 무섭고 냉혹한 철퇴였다. 74년 군부 쿠데타로 황제가 폐위되고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돼 하루아침에 '참전 용사'에서 '반동분자'로 낙인 찍혀 엄격한 감시와 통제하에 삶을 이어온 것이다. 허리가 잘린 남북 분단의 현실이 이 머나먼 아프리카 땅에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을 줄이야. 92년에 와서야 정식으로 한국촌을 돕기 위한 조직적인 활동이 전개됐고, 지금은 여러 단체에서 봉사단과 물자를 보내 이들을 돕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1만여 한국촌 사람의 생활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모든 종교는 다 사랑이지."

다시 길을 떠나는 내 등을 두드려주며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이렇게도 덧붙이셨다.

"가장 훌륭한 사랑의 행위는 관심을 표명하는 것이라 했지. 나는 이곳 사람들에게 큰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끝없이 관심을 가져 주고 싶어. 그게 내 일이야. 관심을 표명하는 것."

그 만남이 있은 지 10년이 다 돼가는 지금, 가뭄에 콩 나듯 한국에 들르실 때마다 안부 전화를 잊지 않으신다. "아직까지 남자 없다고? 그럼 이제 그만 머리 깎지?"라고 농을 치실 때면 스님의 작은 관심에 울컥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곤 한다. 사람이란 부모나 배우자의 사랑에는 당연한 듯 무심하면서도 이렇게 의외의 관심에는 힘을 얻고 삶의 가치를 깨닫기도 하는 법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결코 거창한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은, 그저 한 줌의 관심에서 시작할 뿐이라는 은주 스님의 말씀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 요즘이다.

조정연 여행 칼럼니스트

*** 오늘로 '조정연의 세계일주'는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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