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걷힌 세금 사용처 논란…빈곤층 돕자니 후손이 빚더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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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재정적자를 둘러싼 논란이 다시 가열되고 있다. 적자를 줄여야 한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으나 어떻게 줄이느냐는 점을 놓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경기회복으로 세금이 예상보다 더 걷히면서 초과 세수의 용도를 놓고 당장 적자 줄이기에 써야한다는 주장과 최대 현안인 빈부격차 해소에 써야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양쪽 모두 나름의 논리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지난해 세수 초과분을 빈부차 해소에 쓰라는 지침을 내림에 따라 우선순위 면에서 적자축소는 뒤로 밀린 셈이 됐다.

◇ "빈부격차 해소가 우선" 〓金대통령의 지침이 아니라도 청와대 복지노동수석실이나 보건복지부, 노동부 등 정부부처와 학계의 복지론자들은 더 걷히는 세수를 빈부격차 해소에 돌려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외환위기 이후 경제를 되살리는 과정에서 최대의 희생자가 저소득 빈민층이며, 빈부격차를 시급히 좁히지 않으면 나라의 안정까지 해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올해 소득분배구조 개선작업을 최우선적으로 추진하려면 소요재원의 뒷받침이 없으면 불가능하며, 이를 위해 예산편성 및 지출의 우선순위 조정 등 복지재정 확보방안을 개혁적인 차원에서 검토해나가겠다" 는 김유배(金有培) 청와대 복지노동수석의 발언은 이같은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다.

◇ "재정긴축 의지 퇴색" 〓빈곤퇴치를 이유로 재정을 우선 지출하는 쪽에 촛점을 맞춘다해도 재정부담과 운영의 문제는 남는다.

지난 1일 청와대 복지노동수석비서실이 주최한 '소득분배구조 개선 정책토론회' 에서 제시된 정책들은 모두 돈이 필요한 것들이다.

노숙자.장기실직자에게 끼니당 2천5백원의 긴급식품권을 지급하고 경로연금 지급액을 인상하며 영세사업장 근로자의 임금을 보조한다는 등의 정책은 모두 예산에 주름살을 주는 정책이다.

건설교통부가 대통령 신년사에 맞춰 발표한 주택 50만가구 공급정책도 저소득층 주택구입.전세자금 특별지원에 2조4천5백억원의 국민주택기금을 추가 지원해야하는 것이다.

또 당초 45만가구 수준으로 잡았던 올 주택공급목표를 50만가구로 상향하면 올해 국민주택기금 집행예정 규모는 지난해보다 33%나 늘어난 17조원에 달하게 됐다.

이밖에도 각 부처들이 경쟁적으로 저소득층이나 낙후지역 개발 등을 이유로 세금 감면, 보조금 지원 등의 정책을 내놓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재정적자 축소에 필수적인 재정긴축의 의지가 약화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부처별로 '긴축적' 이라고 보기 어려운 예산편성 및 집행이 늘어나고 있다. 선거를 의식한 정치권의 주문까지 가세하고 있다.

예컨대 농어가 부채경감 사업비는 국회 심의과정에서 3천5백억원이나 증액됐다. SOC예산 가운데는 일반국도 예산이 7백억원, 철도 예산이 4백80억원 늘어났다.

사회간접자본(SOC) 건설사업을 체계없이 추진해 예산을 낭비하는 경우도 많다.

경주시 강동면~포항시 흥해읍을 잇는 13.7㎞의 왕복4차선 도로는 착공 10년이 되도록 완공을 보지 못하고 있다. 매년 예산이 찔끔찔금 배정된데다 수차례 설계변경을 하면서 지연된 것. 때문에 당초 3백38억원이었던 사업비는 3배 가까운 9백93억원으로 증액됐다.

경부고속철도, 인천국제공항 공사등에서 보듯 설계변경과 예산증액은 단골메뉴다.

건교부는 지난해말부터 최근까지 대규모 개발계획을 잇따라 발표하고 있다. 1백44조원이 드는 8개 광역권개발계획, 3백35조원 규모의 국가 기간교통망 계획, 3백78조원 규모의 제4차 국토계획, 8개 개발촉진지구 지정 및 개발계획 등이다.

"예정된 일정에 따라 입안하고 발표하는 것" 이라는 게 건교부의 설명이지만 엄청난 규모의 계획들이 줄줄이 나오고 있는데다 중복된 내용도 많고 재원조달 방안도 불투명해 '선거용' 이란 의심을 사고 있다.

각종 예산이 1분기에 조기 집행되는 것도 문제다. 올해 일반회계예산의 35%, 건설예산의 46%가 1분기에 집행된다.

정부는 최근 공공근로사업을 통해 하루 평균 15만3천명에게 단기 일자리를 제공하는 등 실업대책에 모두 5조9천2백20억원을 투입키로 하고 특히 공공근로사업비 1조1천억원중 65%를 1분기에 쏟아붓기로 했다.

그러나 실업자가 줄어드는 추세에서 실업대책에 예산을 집중 투입한 것은 앞뒤가 안맞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재경부는 서민층의 재산형성을 돕기위해 새로운 비과세 저축을 만들고 우리사주조합과 기업의 성과급 배분 등에 세제혜택을 주는 방안을 마련중이다. 각종 조세감면제도를 축소해 나가겠다는정부의 약속과 배치되는 방향이다.

◇ 전문가 진단〓복지론자들과는 달리 재정전문가들은 경기가 지금처럼 좋을 때 긴축을 통해 나라 빚을 관리해나가야 한다는데 입을 모은다.

이만우 고려대교수는 "재정적자는 한번 누적되기 시작하면 강제적인 노력이 지속되지 않고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속성이 있다" 며 "우리도 미국의 예산통제법과 같은 특별법을 만들어 운영할 필요가 있다" 고 밝혔다.

김종민 국민대교수는 "국가채무를 키우는 것은 후손들의 재산을 아무 허락없이 끌어다쓰는 것과 마찬가지" 라면서 "그나마 아직 선진국에 비해 심각한 상황이 아닌 만큼 더 늦기전에 긴축을 통해 국가채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줄여나갈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고 말했다.

전주성 이화여대 교수는 "통일비용과 선진형 복지제도 등을 감안해 길게 보면 재정적자는 이제 시작일 수 있다" 면서 "근본적인 세제개혁으로 공평 과세를 앞당겨야 하며, 조세 감면제도들도 최대한 털어내야 한다" 고 주문했다.

이재훈.이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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