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학을 제대로 대우해야 선진국 갈 수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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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호 24면

국내에서 누구나 쉽게 전화를 걸고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20년 안팎의 일이다.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전화가 있는 집보다 없는 집이 훨씬 더 많았다. 전화국에 가입 신청서를 내고도 몇 년씩 기다리는 게 예사였다. 당시 남에게 팔 수 있는 ‘백색전화’와 사용권만 주어진 ‘청색전화’가 있었는데, 백색전화에는 200만원이 넘는 웃돈이 붙을 정도였다.

334건 특허 보유 이형호 ETRI 전문위원

86년 국책 사업으로 ‘TDX’란 국산 전전자(全電子) 교환기 개발에 성공하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비싼 수입 제품을 들여왔기 때문에 전화 연결을 위한 교환기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러나 한꺼번에 10만 가입자 이상을 처리할 수 있는 대용량 교환기 ‘TDX-10’이 나오자 드디어 국내에도 집집마다 전화를 놓을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이형호(54·사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전문위원은 전화 대중화를 이룬 ‘1등 공신’의 한 명이다. 그는 전화 교환기의 핵심 기술인 신호장치의 개발 책임자(실장)로 ‘TDX-10’ 개발에 기여했다. 90년대 들어선 한국이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방식의 이동전화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위원은 최근 특허청이 조사 발표한 ‘공공 연구기관 특허왕’에 올랐다. 그가 보유한 특허는 모두 334건. 26년간 ETRI에서 한눈 팔지 않고 연구 활동에 매진한 덕분이다. 특히 2004~2006년 3년간 154건을 등록하는 왕성한 연구실적을 자랑한다. 그는 13일 특허청에서 우수특허연구자상도 받았다. 시상식에 앞서 12일 오후 대전시 유성구 ETRI 본관에서 이 위원을 만났다.
 
-올해까지 ETRI에서 26년간 근무하면서 매년 평균 13건의 특허를 냈다.
“그동안 일일이 세어보지 않아 나도 특허가 몇 개인지 몰랐다. 일에만 파묻혀 열심히 하다 보니 특허는 저절로 따라온 것 같다. 혼자만 잘나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단독 특허보다 여러 연구자와 함께 낸 공동 특허가 대부분이다. TDX 프로젝트 같은 것은 몇 백 명이 잠도 제대로 못 자며 매달린 초대형 국책 사업이었다. 최근에는 신기술 개발과는 거리가 있는 표준연구센터에 근무 중이어서 특허를 내지 못하고 있다.”

-평생 공학 연구자의 길을 걸었다. 특별한 계기가 있나.
“서울대 공업교육과 73학번인데 그때만 해도 박정희 대통령부터 나서 공학도를 우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 집안에선 6남매 중 장남이었는데 교육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다. 그 시절 고교 성적이 좋은 이과생은 서울대 공대에 가는 게 최대 목표였다. 대학 시절엔 실험실습에 재미를 붙여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력서를 보니 대학 졸업 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KAIST는 학생에게 파격적 대우를 해줬다. 군입대가 면제됐고, 학비·기숙사비 무료에 생활비까지 지원했다. 전자 기술 측면에선 진공관에서 반도체로 넘어가는 발전이 눈부셨던 시절이었다. 논문보다는 금성전기 등 기업체와 프로젝트를 통한 현장 경험과 실험실습을 중시했다.”

-민간 기업체나 대학 대신 ETRI를 선택한 이유는.
“지금은 고인이 된 은사 은종관 교수께서 연구소로 가라고 강하게 권했다. 양승택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 ETRI의 전신이던 한국전기통신연구소(KETRI) 선임 연구부장이었는데, 은 교수와 친분이 두터웠다. 그렇게 해서 전산전공 홍진표 박사와 함께 KAIST에서 KETRI로 왔다. 그때 KETRI 직원이 200명인가, 300명인가 됐지만 박사는 나하고 홍 박사를 포함해 5명밖에 없었다. 그만큼 박사급 인력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ETRI에서 첫 번째 특허는 무엇이었나.
“첫 10년 정도는 TDX 개발에 전적으로 매달렸다. 초기엔 미국 AT&T, 스웨덴 에릭슨에서 교환기를 도입하는 조건으로 기술을 배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씩 자체 개발 기술이 생겼다. 첫 특허는 ‘TDX-10’의 신호장치 개발 관련 기술인데, 87년 12월에 특허 출원을 하고 91년 5월에야 정식 등록됐다. 그때는 특허 하나 받으려면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연구자 생활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역시 TDX 개발이다. 만성적인 국내 전화 적체 문제를 풀고, 수출까지 하게 됐다. TDX로 쌓아둔 국산 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90년대 CDMA의 세계 최초 상용화가 가능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ETRI는 CDMA에 들어가는 TDX 기술로 미국 퀄컴에서 특허 사용료를 받고 있다. CDMA 원천 기술은 퀄컴이 개발했지만 상용화를 위한 기술 개발은 우리가 주역이었다.”

-순탄한 길만 있진 않았을 텐데, 가장 힘들었던 때는.
“90년대 후반 외환위기와 벤처 열풍이다. 이때 유능한 동료를 많이 떠나 보내고 고생을 죽도록 했다. 연구부장인 내가 직접 납땜을 해야 할 정도로 숙련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신참들을 일일이 가르쳐 가며 어렵게 연구를 진행했다. 나에게도 스카우트 제의가 왔지만 여기서 할 일이 많다는 생각에 거절했다.”

-전체 특허의 절반 이상이 2000년대 이후 등록한 것이다. 주로 어떤 분야인가.
“고속 라우터(인터넷 통신망 연결 장치), 초고속 광가입자망(FTTH), 차세대 인터넷(IPv6) 표준 등 관련 특허가 대부분이다. 외국 기술을 그대로 가져다 쓴다면 돈도 돈이지만, 보안엔 문제가 될 수 있다. 국산 기술 개발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연구개발은 아무리 해도 끝이 없다. 흔히 한국이 ‘인터넷 강국’이라고 말하지만 초고속 광가입자망으로 보면 그렇지도 않다. 우리가 주춤거리는 사이에 일본이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이공계의 위기’라는 말이 나온 지 제법 된다. 그만큼 젊은 사람들의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각하다.
“연구개발은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3D 업종에 속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공계 연구자는 애쓴 만큼 대접을 못 받는다는 얘기다. 사회과학 분야와 비교하면 이공계를 전공한 것에 서글픈 마음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선진국으로 가려면 첨단 기술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요즘 경제위기에 박정희 대통령 시절을 떠올리는 사람도 많은데, 그 시절 이공계 육성이 산업발전의 원동력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특허왕’이 될 정도로 많은 특허를 냈는데, 보상도 충분히 받았나.
“연구자는 돈보다 왕성한 연구개발에서 보람을 느낀다. 일부 특허는 사용료를 받지 않고 민간 기업에 제공하고, 공동 특허는 여러 사람이 사용료 수입을 나누기 때문에 한 사람이 받는 금액은 크지 않다. ETRI는 특허 개발자에 대한 보상 체계가 잘 돼 있어 아쉬움은 없다. 최다 특허 보유기록은 빨리 다른 연구자가 깨뜨려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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