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기로에 선 총선연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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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후련할 줄 알았다. '오너의 눈에만 들면 그만' 이라는 확신 아래 패거리 싸움 만을 일삼아 온 정치인이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에 곤혹스러워 하는 것이 고소하기만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찜찜하다. 총선시민연대가 공개한 '공천 반대자 명단' 을 몇 번이고 다시 훑어보지만 신이 나지 않는다. 그 속에서 새로운 미래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부패한 정치인을 퇴출하기 위한 낙천.낙선 캠페인은 쉬운 선거운동에 속한다. 명분이 부패척결이기 때문에 거부감을 느낄 시민이 많지 않고 煐?대신 낙선이 목적인 덕분에 돈이 적게 든다.

일단 인터넷에 퇴출명단을 올리고 네티즌을 우군으로 삼아 언론을 회견장 안으로 끌어들이기만 하면 반(半) 이상은 성공하는 게임인 것이다.

게다가 반(反)부패 낙천.낙선운동은 사회적 이해갈등을 불러일으킬 정책적 쟁점을 우회하기 때문에 계층을 뛰어넘는 광범한 연대의 틀까지 구축할 수 있다. 시민운동이 사실상 국민운동으로 '발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쉬운 만큼 결과는 미미하다. 낙천.낙선운동은 몇몇 정치인을 국회에서 쫓아낼 수는 있다. 하지만 지역을 텃밭으로 삼는 붕당을 정책정당으로 바꾸지?못한다.

오히려 오너가 하수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여론을 무마하는 선에서 개혁이 끝날 위험성이 높다.

사당적(私黨的) 구조(構造)를 지탱하는 공천권은 여전히 오너의 몫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미 민주당은 총선연대의 편을 들어주면서 지난해 옷로비로 불거진 위기를 탈출하는가 하면 사당적 구조를 강화시킬 '물갈이' 에 나서고 있다.

한편 자민련은 민주당이 낙천.낙선운동을 배후에서 사주한다는 음모설을 제기하면서 충청권 민심을 다시 장악할 기세다. 자신을 타깃으로 삼는 낙천.낙선운동에서 오히려 생명을 연장할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더욱이 '선거법 제87조' 가 개정되면 최대 수혜자는 다양한 간판을 내걸고 선거판에 끼어들 향우회.동창회.종친회이고 자금과 조직원 머릿수로 후보자를 조여들어갈 이익단체이지, 공익을 대변한다는 총선연대가 아니다.

총선연대가 주창하는 부패척결이라는 명분은 그 수많은 '회(會)' 와 '단체' 가 대변하는 실제 이익보다 표를 움직이는 힘이 약하다.

맥이 빠지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금권선거가 판치는 한국적 상황에서 부패척결은 국민적 염원이다.

그러나 총선연대가 단순히 그 의미를 인적 청산에 국한하면 공정성 시비에 휘말리고 음모설에 쫓길 수밖에 없다. 명단에 낀 정치인이 그렇지 않은 정치인보다 더 부패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럴리즘은 지나치면 독선이 되고 만다. 총선연대는 선거법 제87조를 둘러싼 '전투' 에서는 판정승을 거두고 정치판 개혁이라는 '전쟁' 에서는 지고 있다.

지금은 반부패 낙선운동에서 탈피하여 공익을 중심으로 정책논의에 나서고 당선운동을 벌여야 한다. 그래야 시민운동이 이익단체에 제동을 걸고 향우회.동창회.종친회를 견제하는 감시자로 존재할 수 있다.

다양한 단체가 힘의 균형 속에서 서로 다른 대안을 놓고 논쟁을 벌일 때 시민은 비로소 표를 제대로 던질 판단기준을 갖는다.

총선연대가 반부패 낙천.낙선운동에만 매달린다면 국민은 실망하고 말 것이다. 정책적 대안을 제시할 상상력이 없기 때문에 모럴리즘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너를 대신하여 선거운동에 나서는 '홍위병' 으로 몰아세울 시민 역시 적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는 한국민주주의의 후퇴다. 이제는 총선연대가 스스로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고 그에 힘을 실어줄 '일꾼' 을 찾아 표를 몰아줄 때다. 그 길은 역설적이지만 총선연대가 흩어질 때 보인다. 수백개에 이르는 소속단체를 다같이 만족시켜 줄 정책적 대안은 없기 때문이다.

국민운동을 끝내고 시민운동에 나서야 한다.

김병국<고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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