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상식과 다른 위급 상황 때의 인간심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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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 상황에 처한 사람의 심리는 상식과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진은 9.11 테러 직후의 뉴욕 거리. [중앙포토]

사무실에 화재를 알리는 벨 소리가 울려퍼졌다. 짧은 시간 내 건물이 무너지고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당시 안에 있던 사람들은 벨 소리와 동시에 공황상태에 빠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실제로는 냄새나 연기 등으로 정확한 사태를 파악할 때까지 대피를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결과다. 9.11 테러가 발생한 이후 3년 동안 미국에서 꾸준히 진행돼 온 사람들의 심리 상태와 행동 방식에 대한 연구는 위급한 상황에서의 탈출 행동이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크게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9.11 생존자 대상 조사

이 같은 내용은 미국심리학회(APA)의 월간소식지 'APA 모니터' 9월호에 게재됐다. 미국 컬럼비아대 로빈 거슨(보건학) 교수가 1980년대 이후 대형사건, 특히 9.11 테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번 연구를 진행했다. 질병관리센터(CDC)와 미국표준기술연구소(NIST)에서 연구비를 지원했다.

거슨 교수는 "최첨단 컴퓨터를 이용해 위기상황을 시뮬레이션한 탈출 모델을 만들어도 위기 때 사람들의 행동 양식을 예측할 수 없으면 소용 없다"면서 "앞으로는 초고층 빌딩과 같은 대형 구조물을 지을 때 위기에 부닥친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감안한 탈출 경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슨 교수는 지난 6월 뉴욕 시의회에서 이 같은 연구결과를 발표, 화재안전조치와 관련된 법과 조례를 통과시키는 데 일조했다. 거슨 교수는 "앞으로 빌딩 신축허가나 건축법 개정 과정에서 심리학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심한 연기를 뚫고 헤쳐나간다. 상식적으로 연기가 심한 곳에 다다르면 연기를 피해 뒤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살수만 있다면'이란 심정으로 연기를 뚫고 지나가는 것으로 분석됐다.

또 사람들은 하던 일을 계속 하려 한다는 것이다. 벨 소리가 들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건물을 탈출할 것이란 고정관념은 버려야 한다. 벨 소리는 충분한 단서가 못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기나 다른 사람의 비명 등 다른 단서가 추가돼야 하던 일을 멈춘다. 따라서 벨 소리보다는 인간의 목소리로 위기상황을 알려주고 '어디로 가라'고 일러주는 안내방송이 효과적이다.

돌발상황에서 남을 도와주는 행위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단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과 비교적 친분이 있다면 이타심을 발휘한 사례가 있다.

대부분 들어왔던 문을 통해 탈출하려 한다. 비상구를 알리는 표지등이 켜지더라도 자신이 들어왔던 문으로 향하는 심리가 강했다. 비상구에 대해서는 다녀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일일이 열어야 하는 비상문보다 자동문이 탈출에 효과적이었다.

이와 함께 건물에 거주하거나 들어간 사람들이 건물의 전체 구조에 대한 그림을 머리에 쉽게 그릴 수 있으면 피해를 대폭 줄일 수 있다. 9.11 테러의 경우 월드트레이드센터에 근무하던 많은 사람이 출구나 비상 계단 등이 어디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머릿속 그림이 없어서 피해가 더 커졌다는 분석이다.

이 같은 연구결과에 대해 성균관대 이정모(심리학과) 교수는 "한국인 나름대로의 건축 문화와 위기를 겪는 심리적인 특성에 따라 '위기시 건물 탈출 방식'이 다를 수 있다"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이 같은 연구를 하루속히 진행해 각종 건물 설계나 재난 예방책에 적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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