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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사리 계보 이은 ‘성남오리뜰두레농악’

중앙일보

입력


지난달 31일. 오리공원(분당구 구미동)에 신명이 넘쳐났다. 풍물패의 농악 한마당이 펼쳐진 것. 흥겨운 가락에 이끌려 공원에 산책 나온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저게 뭔지 아세요?” “풍물놀이 아닌가요?” “분당의 전통풍물놀이예요.” “그런 게 있었나요?” 다시 빛을 본지 얼마 안된 때문인지 ‘성남오리 뜰두레농악’(이하 오리뜰농악)은 주민들에게 조차 낯설어 보였다.

30여 년 묻혀있던 전통 풍물놀이

‘오리뜰’은 분당구 구미동의 옛 지명인 광주군 낙생면 구미리의 평야 이름에서 유래됐다. 오리뜰농악은 1940년대 부터 70년대 말까지 한해 농사의 풍년를 기원하는 뜻에서 농번기와 농한기를 가리지 않고 울려 퍼졌다고 한다.그러다 80년대 들어 점차 뜸해지더니 1989년 분당신도시 개발과 더불어 자취를 감췄다. 10여 년간 아파트 숲에 묻혀 사그라들던 ‘전통’의 불씨를 되살린 건 장계석(52·사업)씨의 제보였다. 당시 지역전통문화 발굴사업을 추진하던 한국농악보존협회 성남지회는 “어린시절 마을에서 즐겨들었던 이곳 만의 특유한 풍물놀이가 있었다”는 장씨의 제보를 계기로 사라진 농악을 찾아 나섰다. 강승호(40) 지회장은 “우선 도시가 들어서면서 뿔뿔이 흩어진원로 연희자들을 다시 모아 기초적인 복원과 전승 작업을 진행했다”며 “이후 성남문화원의 지원을 받아 2007년 ‘문화체육관광부 전통예술 복원 및 재현사업’에 선정돼 복원을 마쳤다”고 전했다.

오리뜰농악은 노동과 놀이가 결합한 두레농악으로 쇠가락과 버꾸놀음이 특징이다. 원로 연희자 장양천(78)씨는 “가락도 가락이지만 차림새가 눈길을 끈다. 상모 벙거지의 꽃을 빨간색으로 장식하고 벙거지 윗면에 금속장신구를 부착해 화려함을 더했다”고 설명했다.이밖에 육띠기(쇠 징·제금·북·장구·호적)나 삼잽이(제금·장구·호적) 등으로 굿거리 장단을 연주하는 것도 여느 농악과 다른 점이다.

복원되자마자 다시 사라질 위기

오리뜰농악은 단지 전통문화라는 이유만이 아니라 예술성도 뛰어난 풍물이다. 1947년 용인 김량장리 농악경연대회 2위, 1948년 광주(현 성남) 분당리 농악경연대회 2위, 1949년 광주 고등리 농악경연대회 1위 등 화려한 수상 이력이 그것을 증명한다. 복원후에도 제 16·17회 경기도 청소년 종합예술제 최우수상, 우수상을 차지하는 등 여러 대회에서 수상했다.

하지만 오리뜰농악의 앞날은 그다지 밝지 않다. 젊은 계승자들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 2007년 복원 당시 20명이던 정식 단원은 현재 7명 만 남아 있다. ‘경제활동의 어려움’이 그이유로 꼽힌다. 복원 기초 과정부터 참여했던 노지미(31)씨는 “단원 대부분이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20~30대”라며 “고유 문화에 대한 무관심 탓으로 지원이 없어 유지가 힘들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심지어 숙소는 물론 변변한 연습실 조차 없어 매번 공연을 준비할 때면 뜨내기처럼 이곳 저곳 옮겨다녀야 했다. 단원 활동을 통한 수입도 거의 없다. 서승상(33) 단원은 “단원 대부분이 투잡(two Job)을 하며 오리뜰농악을 꾸려나간다”고 하소연했다. 문화센터와 학교에서 번 수입에서 최소한의 생계비를 제외하곤 모두 농악단의 운영비로 보탠다는 얘기였다. 턱없이 부족한 인원 탓에 공연 때는 객원단원 3명과 오리뜰 농악을 계승받고 있는 고등학생들이 함께한다. 서씨는 “사명감으로 어렵사리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진 모르겠다”고 전했다.

강 지회장은 “오리뜰농악은 지역문화이기 전에 우리의 소중한 향토문화유산”이라며“힘들게 찾아낸 만큼 잘 지켜나갈 수 있도록 지역사회와 주민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사진설명]성남오리뜰두레농악 단원들이 오리공원에서 성남오리뜰두레농악을 선보이고 있다. 오리뜰농악 원로 연희자들의 30여년전 모습. 김현득·김종목·김근배·장양천·이종훈씨(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 이유림 기자 tamaro@joongang.co.kr >

< 최명헌 기자 choi315@joongan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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