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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병욱칼럼] '반개혁' 이란 잣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오늘은 별수없이 인기없는 글을 써야 할 것 같다.

시민단체들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들의 낙선운동에 찬성하는 사람이 조사대상자의 80%이고, 불법으로 판정나더라도 낙선운동을 강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72%나 된다니 말이다.

결론부터 말해 필자는 시민단체들의 낙선운동, 특히 경실련의 공천 부적격자 명단 선정.발표에는 문제가 많다고 본다.

물론 이런 사태는 이번 선거법 '개악(改惡)' 협상과정에서 보듯이 거듭 국민들에게 환멸을 준 정치인들이 자초한 일이다.

더구나 시민단체들의 낙천.낙선운동은 벌써부터 긍정적 효과를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정당 민주화.상향식 공천 요구를 묵살하고 밀실공천으로 당선 가능성만 따지던 정당들이 시민단체들의 문제제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보다 엄격한 인물검증과 새로운 공천기준 마련에 부심하는 분위기다.

이러한 긍정적인 파급효과에도 불구하고 낙천.낙선운동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기본적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운동의 합법성 문제다. 시민단체들이 구체적 명단을 내놓고 낙선운동을 하는 건 현행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59조와 87조 사전선거운동 및 단체의 선거운동 금지규정에 저촉될 수 있다.

경실련의 발표명단은 공천 부적격자를 예시한 것이니 아직은 선거운동이 아니고, 노조 이외의 단체만 선거운동을 금지한 규정은 헌법위반이어서 폐지운동을 벌여 왔다는 항변도 있으나, 법이 고쳐지지 않은 단계에서 이 운동이 낙선운동으로까지 가게 되면 실정법 위반은 명백하다.

실제로 시민단체들은 과거 군부독재하에서 민주화투쟁을 언제 법을 지켜가며 했느냐, 감옥에 갈 각오로 낙선운동을 하겠다지만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은 군사독재하가 아닌 94년 3월 문민정부에서 여야 합의로 제정된 법임에 유의, 법개정 운동에 우선 주력해야 할 것이다.

둘째, 운동의 과녁이 적절하냐 하는 문제다. 우리 정치의 불모성.파쟁성 및 지역대립구도의 책임에선 어느 정치인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대부분의 국회의원은 원인제공자라기보다는 하수인에 불과하다.

영-호남이 대립하고, 거기서 충청도가 갈려 나오고, 영남이 TK와 PK로 가지를 친 것이 모두 누구 때문인가. 3공화국 이후 역대 집권자와 정치지도자들은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정치의 불모와 대립도 보스들에게 덜미가 잡혀 있는 일반 의원들보다는 각 정당의 보스들에게 더 근원적인 책임이 있다. 그런데 나온 명단을 보면 애꿎은 국회의원만 중심 타깃이 돼 있다.

셋째, 명단 선정의 기준이다. 우선 너무 포괄적이다. 시민단체들도 각각 전문분야가 있을 터인데 너무 많은 기준을 망라하고 있어 검증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린다.

특히 부적격 후보자의 선정기준중 반개혁.개혁입법반대라는 항목은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공정한 법을 만들려는데 직역(職域)이기주의나 사적인 이해관계로 이를 반대한 정치인을 응징하겠다는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개정반대를 거론하는 등 이념적 색채를 드러내는 건 사회적으로 큰 분란의 빌미가 될 것이다. 어느 사회고 개혁과 보수는 적당한 균형을 이루는 게 바람직하고 남북대치상황하에 있는 우리나라에선 더욱 그렇다.

만일 경실련 등이 이런 이념적 반개혁을 낙선운동 후보 선정기준으로 고집한다면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체제 수호에 기여했다고 자부하는 세력들이 좌시하고만 있겠는가.

더구나 경실련의 명단은 국보법반대로 26명의 정치인을 거론했는데 모두 한나라당 소속뿐이고, 같은 입장을 표명한 자민련 소속은 한명도 들어 있지 않다.

시민단체의 선거와 정치에 대한 감시와 기여는 역시 공명선거 감시와 후보자 바로 알리기가 그 본령이다.

낙천.낙선운동까지 나가 정치의 회오리에 휘말리게 되면 결국 시민운동의 순수성마저 훼손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성병욱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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