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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 붕괴 20년, 그 후 세계는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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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그 후 혁명적 변화들이 잇따랐다. 소련이 조용히 사라지며, 냉전 체제가 무너졌다. 독일은 재통일됐고, 동유럽과 소련의 위성국들이 차례로 독립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백 차별 정권이 무너졌으며, 아시아·아프리카·남미의 많은 내전이 종식됐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그 어느 때보다 평화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미국은 냉전 이후 유일 초강대국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20년이 흐른 지금, 이라크 전쟁과 경제 위기를 겪으며 특별한 지위를 잃고 있다. 힘을 과신해 현실을 직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잘못도 있었지만 미국이 쇠퇴의 길로 접어든 건 사실 그 이전부터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세계의 질서를 재편할 기회가 있었다. 끔찍한 테러에 직면해 아랍 국가를 포함한 세계는 원대한 계획을 수용할 준비가 돼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에 평화가 정착돼 중동에 새 시대가 열릴 수 있었다. 탄소세 같은 급진적 대책도 미국의 국가 안보를 위해 도입할 수 있던 시기였다. 만약 그때 이를 도입했다면 지구촌 기후 변화로 인한 도전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을 터다.

독일, 나아가 유럽은 베를린 장벽 붕괴의 가장 큰 승리자였다. 독일이 1990년 10월 3일 재통일되며 유럽 대륙은 자유를 만끽했다. 2004년 5월 1일에는 새로운 회원국들의 가입으로 유럽연합(EU)이 확대됐다. 유럽 공통 화폐인 유로의 도입도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EU 헌법 제정을 통한 정치 통합이 실패로 끝나며 EU는 내·외적으로 지지부진했다.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유럽은 부상하는 신흥 강대국에 밀려 21세기에는 급격히 영향력을 잃을 수도 있다. 베를린 장벽 붕괴의 가장 큰 패배자인 러시아는 여전히 사회·경제적 침체와 정치적 퇴행·환상 속에서 헤매고 있다. 기대 수명은 갈수록 줄고 인프라·연구·교육 투자는 부진하다. 그럼에도 러시아 지도자들은 19세기와 20세기의 낡은 권력 구도에 갇혀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베를린 장벽 붕괴는 냉전의 종식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계화의 시작이었다. 새로운 세계 질서의 진정한 승자는 국제사회에서 정치·경제적 발전을 거듭하는 중국·인도 등 신흥 강대국이다. 서방 선진국 모임인 주요 8개국(G8)은 점차 힘을 잃고 있다. G8의 빈 자리를 주요 20개국 모임(G20) 또는 미·중 양대국(G2)이 차지하고 있다. 이 모든 변화는 세계 권력이 서방에서 동방으로, 유럽에서 미국을 거쳐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앞으로 20년 내에 지난 400년간 지속된 유럽 중심의 세계 질서는 종말을 맞을 것이다.

지난 20년은 지구촌의 생태학적 한계를 드러낸 시기였다. 사람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서구인의 생활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지구의 기후와 생태계를 파괴해 왔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20년간 엄청난 변화가 잇따랐지만 진정한 대변혁의 시기는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지구온난화는 세계인이 직면한 거대한 변화라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다음 달 코펜하겐에서 열리는 기후변화 정상회의는 베를린 장벽 붕괴 20년 만에 맞는 첫 번째 중대한 도전이다. 모든 국가가 일치 단결해 행동할 때다.

요슈카 피셔 전 독일 외무장관
정리=정재홍 기자 ⓒProject Syndic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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